미국 CIA는 파키스탄에서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통해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정보수집을 벌였다. 그 이후로 활동가들이 정보원으로 오해받아 소아마비 백신 접종이 곤란한 상황이 됐다.

오사마 빈 라덴과 소아마비. 둘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2011년 9·11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은 미국의 추적 끝에 2011년 5월 파키스탄에서 숨졌다. 그리고 파키스탄은 올해 아동 소아마비 발병 사례가 가장 많이 보고된 나라다. 파키스탄과 관계됐다는 점 말고 이들은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빈 라덴 때문에, 정확히는 빈 라덴을 찾으려던 미국의 작전 때문에 파키스탄에서 소아마비가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소아마비는 어린 아이들, 특히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질병이다. 조기 치료에 실패하면 골격이 기형으로 바뀔 수 있다. 사망률도 5~7%에 이른다. 그러나 백신이 발달하며 소아마비는 유아기에 예방접종만 제대로 하면 극복할 수 있는 질병이 됐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994년에는 서유럽 지역이, 2000년에는 한국을 포함한 서태평양 지역에서 소아마비가 박멸됐다고 선언했다. 어느덧 소아마비는 일부 저개발국에서만 볼 수 있는 질병이 됐다.

지난 2011년, 한 파키스탄인이 파키스탄의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오사마 빈 라덴의 사진을 전시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CIA 작전 드러나자 활동가들 위축
아프가니스탄, 나이지리아와 함께 파키스탄은 대표적으로 소아마비 문제가 심각한 나라다. WHO는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인 페샤와르 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큰 소아마비 저수지”라고 표현했다. 많은 아동들에게 공급할 백신, 혹은 백신을 마련할 재정이 이들 국가에는 부족하다. 당연히 이들 국가에서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소아마비 백신 접종이 시급하다. 파키스탄은 이미 1991년 재정문제 때문에 아동 17%가 소아마비 백신을 접종하지 못했던 경험이 있다. 그래서 WHO와 구호단체들을 중심으로 한 백신 접종 프로그램 지원이 필요하다. 그러나 파키스탄에는 백신 접종을 도울 이들이 발을 붙이기 어렵다. 가짜 백신 프로그램 때문이다.

가짜 백신 프로그램은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빈 라덴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벌인 작전이었다. 북부 아보타바드에 빈 라덴의 자녀들이 있을 것으로 본 CIA는 가짜 백신 작전을 개시했다. 어린이들에게 B형 간염 백신 접종을 한다며 피를 뽑은 뒤, DNA를 추출해 빈 라덴의 DNA와 대조한 것이다. 그렇게 포위망을 좁혀나간 CIA는 결국 빈 라덴을 사살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11년 7월 가디언 등의 보도로 CIA의 가짜 백신 작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파키스탄 의사 샤킬 아프리디가 이 작전을 도왔다는 사실까지 밝혀졌다. 결국 2012년 리언 패네타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 가짜 백신 작전을 인정했다. 아프리디는 파키스탄 군 정보국(ISI)에 체포됐고, 2012년 5월 반역 혐의 등으로 33년형을 선고받았다. 형량이 23년으로 줄긴 했지만, 현재 아프리디는 변호사마저 변호를 포기한 상태다.

가짜 백신 작전 전에도 백신 프로그램에 대한 우려는 파키스탄인들 사이에서 만연했다. 백신 프로그램을 통해 무슬림을 멸절시키려 한다는 소문이 파키스탄에 돌았기 때문이다. 백신에 소변을 탔다는 괴담도 있었다. 의료 전문가들은 이 소문을 일소하려 애썼다. 하지만 CIA의 비밀작전이 탄로나자 문제가 심각해졌다. 백신 접종이 파키스탄 북부 주민들을 위협했다는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지난 5월 6일 파키스탄의 라왈핀디에서 의료인들이 아이에게 소아마비 백신을 주사하고 있다. | AP연합뉴스


그러나 CIA는 이후에도 파키스탄에서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통해 정보수집을 벌였다. 리사 모나코 백악관 대테러·국가안보 보좌관은 5월 16일자로 미국 13개 공공보건 학교장들에게 보낸 편지에 “CIA 국장이 2013년 8월부로 백신 프로그램과 참여 인원들을 정보작전에 이용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썼다. 이 학교장들은 지난해 1월 가짜 백신 접종 프로그램으로 정보활동에 나선 CIA를 비판하는 편지를 백악관에 보냈고, CIA는 1년 뒤 그에 답했다. 결국 CIA가 2013년까지는 백신 프로그램으로 정보활동을 벌였다고 인정한 꼴이 됐다. 소아마비 백신 접종은 B형 간염처럼 항체 확인을 위해 채혈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개는 자원봉사자들이 집집마다 아이들을 방문해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 집집마다 방문한 활동가들이 파키스탄의 정보를 빼내는 정보원이 아닌지 탈레반과 지역 주민들은 우려를 접을 수가 없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던 미국은 빈 라덴을 잡고 탈레반을 소탕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맞댄 파키스탄 북부까지 반경을 넓혔다. 명목상 국경이 있지만 탈레반은 국경 산악지역을 넘나들며 활동했기 때문이다. 10년이 넘도록 끝나지 않는 전쟁에 미군은 무인기까지 투입해 파키스탄 북부를 공격했다. 결국 파키스탄 탈레반은 무인기 공격을 중단하라며 2012년부터 소아마비 백신 프로그램 접종을 금지시켰다. 소아마비로 고통받는 아이들을 볼모로 미군의 공격을 막으려 한 것이다.

공격 받을까 활동가들 두려움 호소
접종을 도울 활동가들도 죽음을 무릅쓰는 상황이 됐다. 탈레반과 주민들이 이들 활동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백신 접종 활동가들은 파키스탄 경찰과 정부로부터 허가증을 발급받는다. 그러나 탈레반을 비롯한 지역 무장단체들은 정부 통제 밖에 있다. 탈레반이 활동가들이 거니는 마을이나 일하는 병원까지 공격하면 경찰도 지역 주민도 모두 희생양이 된다. 외국단체뿐 아니라 파키스탄인들도 공격에 노출돼 있다. 파키스탄 내에서도 1990년대부터 ‘여성 보건 활동가 운동’이 시작돼 백신 접종 활동을 벌였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여성 중 지난 2년간 숨진 사람이 30명을 넘겼다고 가디언이 전했다. 여성 보건 활동가 운동에 참여했던 나심 무니르는 “매일 백신 접종을 하려 집을 나설 때마다 집에 돌아가서 세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있을까 걱정한다”며 “우리는 일상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처지에 놓인다. 우리는 스스로를 군인이라 생각하지 않으면 백신 접종 현장에 갈 수 없다”고 호주 ABC방송에 말했다.

결국 접종은 난항을 겪었고, 파키스탄의 소아마비는 크게 늘었다. WHO 산하 소아마비 근절 글로벌 이니셔티브는 올해 전 세계에서 파악된 소아마비 발병 사례 77건 중 61건이 파키스탄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밝혔다. 지난해 1년간 파키스탄에서 발견된 사례 93건을 훌쩍 넘길 기세다. 그러자 WHO는 5월 초 소아마비 발병 사례가 거듭 보고된 뒤 ‘공중보건 경보’를 선언했다. 하지만 여전히 파키스탄이 자체적으로 소아마비 백신 문제를 해결하긴 어렵다. 정부는 5월 26일부터 사흘간 페샤와르 지역의 아동들에게 백신을 투여하기로 했다. 그러나 한 정부 관계자는 “치안상황 때문에 약 36만9000명은 백신 접종을 받기 어렵게 될 것”이라고 AFP통신에 말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