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응노와 충남 홍성, 김환기와 전남 신안 안좌도, 유영국과 경북 울진, 전혁림과 경남 통영…. 한국 근현대미술의 대가들에게 고향은 작품의 무대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다. 고향하면 생각나는 목가적인 풍경화도 있지만, 고향의 상징이 추상화의 형태로 발전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과 해방, 전쟁과 분단이 이어졌던 격동의 한국 근현대사와 맞물려 고향은 화폭에 생각보다 다양한 형태로 기록돼왔다.
광복 80주년을 맞아 서울 중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지난 14일 개막한 ‘향수, 고향을 그리다’는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부터 남북 분단 후인 1980년대의 풍경화 210여점을 공개한 전시다.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미술가 75명의 작품이 총망라됐다. 광복 80주년 기념 전시의 주제가 고향인 것은, 광복 전후 급변했던 역사에 따라 한민족에게 고향의 의미도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고향이 ‘되찾아야 할 것’, 해방 후에는 ‘기록하고 지켜야 할 것’이었다면, 한국전쟁 이후에는 어떤 이들에게 고향이 ‘그립지만 찾아갈 수 없는 것’이었다.

한 작가의 그림에서도 시대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1·2전시실에 초입에 각각 위치한 이상범의 ‘귀로’(1937)와 ‘효천귀로’(1945)는 각각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과 안개가 낀 듯한 주변의 풍경을 그린 그림이다. 다만 일제 강점기에 그려진 ‘귀로’에는 적막함과 스산함이 지배적이라면, ‘효천귀로’는 전봇대처럼 높이 솟은 나무 등을 통해 전보다 진취성을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응노는 고향 홍성을 비롯한 충청지역의 넓은 평원과 멀리 떨어진 산을 다양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화풍을 정립해나갔다. 그러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에는 ‘폐허의 서울’(1950년대) 등 전쟁의 참상을, 1960년대에는 ‘당인리발전소’(1969) 등 발전해나가는 서울의 모습을 그리는 등 역사의 기록자로 있었다.

김환기는 점과 선을 반복적으로 찍어 그린 ‘점묘화’를 본격적으로 그리기 전에는 고향 안좌도와 그 앞의 바다, 바다에 비친 달을 주로 그렸다. 유영국은 울진의 산을 기하추상화의 소재로까지 발전시켰다. 그의 ‘산’ 연작이 풍경화를 닮은 반(半)추상화에서 삼각·사각의 형태가 도드라지는 기하추상의 형태로 바뀌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통영의 푸른 바다에서 복작이는 배와 포구, 건물을 그린 전혁림은 고향의 풍경과 전통문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전쟁으로 삶의 터전을 두고 온 작가들의 그리움과 아쉬움이 담긴 작품들도 함께 자리한다. 원산에서 결혼했으나 한국전쟁 후 제주도로 이주했고, 이어 부인과 두 아들을 일본 도쿄로 보낸 뒤 본인은 부산과 통영 등지를 오갔던 이중섭의 글과 그림도 공개된다. 그의 1950년대 작품 ‘가족’과 ‘현해탄’(1954) 등은 그리운 가족과의 만남을 상상하며 그려낸 것이다. 황해도 해주 출신으로 한국전쟁 시기 월남한 박성환은 멀찍이 떨어져 봤을 때 여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는 추상화 ‘망향’(1971)을 통해 자신의 이상향인 고향을 그렸다. 평양 출신 작가 김원이 그린 1954년의 풍경화 한 점(제목 미상)도 대중에 처음 공개된다.

이번 전시에서는 영·호남과 제주 등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각 지역에서 발굴한 작가들의 작품도 여럿 소개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 오지호 등이 몸담았던 경성의 녹향회 외에 대구의 향토회, 부산의 춘광회, 광주의 연진회 등 지역의 풍토와 자연지형을 채색과 붓질의 변화로 표현해낸 작가들의 모임이 지역별로 존재했다. 오지호의 ‘동복산촌’(1928)은 그의 고향 전남 화순군 동복면의 마을 풍경을 밝은 색채로 그려낸 유화다. 자연의 풍경을 인상주의적으로 표현해낸 것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리움미술관 소장품으로 국내 전시에는 처음 소개된다. 이밖에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지역 화가들의 작품이 전시를 계기로 모였다. 국립현대미술관 외에 국내 38개 기관과 개인 및 유족이 전시에 소장품을 대여했다.
전시는 오는 11월9일까지. 입장료는 성인 2000원. (덕수궁 입장료 1000원 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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