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글라데시 동남부 콕스바자르(Cox’s Bazar)는 휴양도시다. 그러나 해변도로를 따라 도심을 벗어나면 이내 풍경이 바뀐다. 벼가 자라는 논을 지나 시외로 35㎞쯤 나가자 검은색, 주황색 방수천을 두른 집들이 야트막한 언덕을 가득 메우고 있다. 각종 구호·인권단체 로고가 새겨진 차들이 달리는 도로 옆에는 머리에 구호물자를 이고 걷는 사람들도 보인다. 인접국 미얀마에서 국경을 넘어온 로힝야(Rohingya)족이다.
지난 8월25일 미얀마군이 북부 라카인주에서 로힝야인들을 대상으로 인종청소 성격의 군사훈련을 개시했다는 소식이 전 세계에 알려졌다. 국제이주기구(IOM)는 총탄과 방화를 피해 지난 18일까지 로힝야인 62만여명이 국경을 넘었다고 추산했다. 이미 로힝야인 20만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던 콕스바자르 난민촌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난민촌이 됐다. 종교와 민족, 역사가 얽힌 분쟁이 그렇듯 로힝야 사태는 복잡하기 그지없다. 미얀마 민주주의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도 손을 놓고 있다. 미얀마에 대한 국제사회의 압박과 난민들에 대한 지원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약해지고 있다. 지난 6~8일 현지를 찾았다. 난민촌의 외양은 차분했지만 곳곳에 깊은 한숨이 배어 있었다.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로힝야인들에게 사치에 불과했다.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는 물론이고 기본적인 생명권마저 박탈당한 그들은 살아 있어도 산 목숨이 아니었다.
땡볕에 구호품 받으려 30m 줄…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난민촌
■ 난민촌, 물과 더위와의 사투
난민촌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집들이 들어찬 흙 언덕이었다. 이 언덕들은 대부분 2차선 포장도로 옆에 있었다. 위치가 도로변인 것은 구호물자 때문이라고 했다.
각 구호단체는 난민촌을 돌아다니며 물자를 직접 나눠주는 대신 교환권을 돌려 가정마다 지정된 장소에서 구호물자를 받게 하고 있다. 튀긴 쌀 등 식량, 집 짓는 데 필요한 방수천·밧줄·담요, 비누·칫솔 등 위생도구까지 다양했다. 물자 분배소는 대형 차량에서 구호물자를 옮기기 편하도록 포장도로를 따라 위치했다. 그러면 난민촌 사람들은 도로를 따라 교환권에 적힌 장소로 이동했다. 이들은 물자 배분 2시간 전부터 뙤약볕 아래 줄지어 서 있었다. 길이는 30m를 족히 넘는 듯했다. 한 가족이 하루에 여러 교환권을 받으면 가족 구성원들이 각자 다른 장소로 물자를 받으러 간다고도 했다.
난민촌이 언덕 위에 있는 것은 안전 때문이라고 했다. 난민촌에 출몰하는 들짐승들을 피하고 갑작스러운 폭우에 집이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무슬림인 로힝야인들은 난민촌이 조성되면 언덕 맨 위에 모스크부터 만든다고 했다. 어느 난민촌을 가든 언덕 꼭대기에서는 다른 흙 언덕에서 중장비들이 정지작업을 하는 게 보였다. 새로운 난민촌을 조성하려는 듯했다.
집들은 대개 얇은 나무줄기로 뼈대를 세워 흰색 방수천으로 지붕을, 검은색·주황색 방수천으로 외벽을 둘러싼 형태였다. 서너평 정도 되는 집 안에 보통 10명 가까운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몇 집 건너서는 주황색 방수천으로 둘러싼 공중화장실도 보였다. 화장실 또는 샤워부스로 불리는 이 공간에서 여성들은 범죄에 노출될 우려도 있다고 한다. 한 구호단체 활동가는 “구호물품에는 이 지역 여성들이 입는 전통의상이나 속옷, 생리대 등 여성에게 필요한 물품이 적어 고민”이라고 말했다.
난민촌의 한 가정을 방문했다. 지난 7일 하킴파라(Hakimpara) 난민촌에서 찾은 압둘 와히드(62)의 집. 집이라기보다는 천막에 가까웠다.
별도로 부엌이 구분돼 있지 않아 밥을 지으려 피운 연기가 집 안에 가득 찼다. 밤에 뱀이나 들짐승이 찾아올지 모른다며 창문도 뚫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물과 더위”라고 했다. 11월 초인데도 콕스바자르의 최고기온은 30도가 넘었다. 난민촌에는 더위를 피할 수 있는 그늘도 거의 없었다. 이들이 사는 언덕엔 원래 나무들이 심겨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집터를 마련하고 건축자재나 땔감으로 팔기 위해 나무를 베어버렸다.
깨끗한 물 구하기도 어려웠다. 농부였던 와히드는 “미얀마에 살 때는 물이나 채소를 구하지 못할까 걱정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미얀마·방글라데시 국경에는 인도양으로 흐르는 나프강이 있지만 난민촌과는 거리가 멀다. 난민촌에서 구할 수 있는 물도 약품처리를 하지 않은 채 쓰면 피부병, 설사병 등에 걸릴 수 있는 상태라고 했다. 구호단체들이 설치한 펌프가 마을 곳곳에 있긴 했다. 하지만 대개 언덕 아래에 위치해 있어 와히드 같은 고령자들이 펌프까지 가서 물통을 지고 언덕을 오르긴 쉽지 않아 보였다. 집 근처에 고인 진흙탕에서 물을 떠오는 사람들도 보였다.
■ 위험에 노출된 아이들과 부족한 병원
난민촌은 구호물자를 이고진 채 움직이는 사람들과 집 짓는 소리를 빼면 대체로 조용했다. 네댓평쯤 되는 공간에서 아이들이 “이(E), 에프(F), 지(G)” 등 알파벳을 말하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난민촌 내 아동 친화 공간(Child Friendly Space)에서는 아이들의 심리 상태를 안정시키기 위한 프로그램도 진행됐다. 4~5살쯤 되는 아이들이 서로 작은 주먹만 한 고무공을 주고받으며 자기 이름을 소개하며 경계를 풀게끔 했다. 벵갈어뿐 아니라 구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 도움을 준 외국어를 배운다고 했다. 이 센터에서 통역을 맡은 로힝야인 셰이크 아흐메드(24)는 “피란을 온 아이들에게 이곳이 ‘안전한 곳’이라고 정서적으로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크고 작은 위험에 노출돼 있었다. 아흐메드는 전날만 해도 한 아이가 길을 건너다 차에 치여 머리를 크게 다쳤다고 전했다. 압둘 하페즈(17)는 가족들이 사는 난민촌에 지난달 말 아침 코끼리가 난동을 피우는 바람에 12살 동생이 다리를 다쳤다고 말했다. 다행히 지난달 16일 방글라데시 적신월사가 세운 야전병원이 문을 열어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병원이 없었다면 동생의 운명은 오직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구호단체에서는 로힝야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오는 과정에서 헤어진 가족들과 연락을 하게끔 돕고 있었다. 연락이 끊긴 가족이 누군지 난민촌별로 알려주면 서로 연락할 수 있게 다리를 놔준다는 것이었다.
많은 로힝야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기침과 열은 적십자사 등이 세운 난민촌 내 임시 병원에서 진료해주고 있었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약을 지어주면서 손씻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마을 입구마다 벵갈어로 번역된 ‘손씻는 방법’ 안내 팻말이 보였다. 한국에서 가르치듯 손가락 사이와 손톱까지 닦으라는 그림이 인상적이었다.
야전병원도 문을 열었다. 나무 그늘이 진 공터에 세워진 대형 텐트 안에 여러 침상이 놓인 병동과 엑스(X)레이 등을 촬영할 수 있는 진료실 등을 차렸다. 임시 병원에서 할 수 없는 간단한 수술도 가능하다고 한다. 임신한 로힝야 여성이 병원에 입원해 아이를 낳기도 했다. 방글라데시로 피란하는 과정에서 조산 등 출산 문제를 겪는 산모들이 야전병원을 찾았다. 야전병원 관리를 맡은 방글라데시 적신월사 벨랄 호세인(53)은 “난민촌 임시 병원에서는 응급처지만 가능하기 때문에 병원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총부리에 떠밀려 국경 넘었지만, 태어난 땅에 살 권리 찾고파”
이곳의 환자는 호흡기질환, 설사, 피부병, 영양실조 등 기본적인 생활 수준이 갖춰지면 걸리지 않는 병에 걸린 사람부터 미얀마에서 총상, 화상 등을 입은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호세인은 “임시 보호소에서 조산 때문에 힘들어하던 임산부를 병원으로 이송해 아이를 낳게 한 적이 있다”며 “산모도 건강을 되찾게 되는 걸 보며 기뻤다”고 말했다.
■ 긴장의 국경검문소
미얀마군의 군사작전이 시작된 지 석 달 가까이 지난 11월에도 방글라데시로 넘어오는 로힝야 사람들이 있지 않을까. 그들을 만나기 위해 지난 8일 국경검문소로 향했다.
난민촌에서 무심결에 바라봤던 먼 산이 미얀마 영토라는 설명을 들었다. 놀라울 정도로 난민촌과 국경은 가까웠다. 하지만 난민촌 근처 검문소를 지키는 군인들로부터 “지난주만 해도 이 검문소를 5000명 정도 통과했는데 이번주 초에는 아무도 넘어오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차로 1시간30분을 더 달려 찾은 테크나프(Teknaf)에 가서야 트럭 뒤칸에 탄 로힝야 사람들 30여명과 마주쳤다. 구호단체 활동가들이 적십자 마크가 새겨진 조끼를 입은 기자에게 “얼음찜질팩이 있느냐”고 물었다. 일행 중 열이 심한 아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로힝야인들은 전날 국경을 넘어 이날 방글라데시군에 등록을 하러 가는 길이었다.
일가족으로 보이는 이들은 곧장 인근 난민촌의 등록장소로 향했다. 사진을 찍고 이름, 종교 등을 적은 뒤 열 손가락에 도장을 찍었다. 신원을 파악하기 위한 절차였다. 난민촌에서도 군인들이 비슷한 일을 했다. 군인들은 하킴파라 난민촌 임시 병원에서 휴대폰 카메라로 로힝야인 가족들의 사진을 찍었다. 일련번호가 적힌 종이를 들어보이게 하고는 가족별로, 개인별로 사진을 찍었다. 구호물자 수요 조사도 조금 더 용이해질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군은 난민촌별로, 구역별로 대표자를 하나씩 지정했다.
방글라데시 정부가 로힝야 사람들을 쉽게 통제하려 하는 목적도 엿보였다. 현지 언론들은 범죄집단들이 신원 파악이 안된 로힝야 사람들을 무기·탄약 밀매, 마약 운반에 이용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벌마파라(Burmapara) 난민촌에서 만난 압두 라우힘(20)은 “어느 날 살던 난민촌에 군인들이 찾아와 사람들에게 ‘일괄적으로 다른 난민촌으로 옮기라’고 시켰다”고 말했다. 현지 활동가는 “로힝야 사람들이 자주 들어오던 검문소의 담당 군인이 얼마 전 바뀌더니 그가 단체 활동가들에게 ‘난민을 인도하면 체포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 “시민으로 미얀마에 돌아가고 싶어”
그들은 왜 이곳을 찾았을까. 와히드는 미얀마군이 마을을 공격한 이후 피란을 결심했다고 했다.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마을을 떠나라고 하면서 허공에 위협 사격을 해댔습니다. 사람들은 사흘 정도 숲으로 몸을 피했습니다. 다시 마을에 돌아왔을 땐 군이 없었고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 다시 군이 왔습니다. 그때 그들은 총부리를 허공이 아니라 사람에게 겨누더군요. 집에는 불을 질렀습니다.” 와히드는 그날 마을 사람들이 50~80명 정도 숨졌다고 증언했다. 그중엔 그의 사촌들도 있었다. 그는 떠밀리듯 국경을 넘었다. 난민촌에 도착한 와히드의 가족 8명에게는 그들이 입고 있던 옷들만 남아 있었다.
임시 보호소에서 만난 딜 모함마드(40)의 가족도 비슷했다. 그의 가족 9명은 임시 보호소에서 일주일째 머물며 정착할 난민촌을 찾고 있는 상태였다.
로힝야 사람들은 국경을 넘은 뒤에는 임시 보호소 등에서 기다리다 현지 구호단체나 군의 안내에 따라 난민촌에 이동해 집을 짓고 산다. 아직 거처를 정하지 못한 모함마드의 가족들은 텐트에서 생활 중이었다.
모함마드는 지난달 중순 어느 날 밤 군이 마을에 닥쳐들자마자 피란을 결심했고 보름 만에 방글라데시에 닿았다. 그는 “미얀마에서 군인이 젊은 여성을 때리고 성폭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다. 지난 7일 난민촌에서 만난 라우힘도 “다른 마을이 불탔고, 군인들이 (주민들을) 강간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흘 만에 국경을 넘었다”고 했다. 라우힘은 아내가 임신 중이었지만 피란을 결심했다.
같은 날 난민촌에서 만난 아흐메드는 조금 달랐다. 아흐메드는 미얀마의 국경도시 마웅도의 중학교에서 4년간 영어교사로 일하다 한 달 전 난민촌에 오게 됐다. 그는 “미얀마에서 소수민족으로 사는 설움 때문에 피란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로힝야인 친척 한 명이 버마인과 결혼했습니다. 그래서 예전엔 돈을 주면 수도 양곤에 오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5년 전부터는 어느새 로힝야 사람들은 모스크에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5년 전인 2012년은 무슬림인 로힝야 사람들과 미얀마 다수 불교도들이 라카인주에서 유혈충돌해 200여명이 숨진 때였다. 그는 “식당에서도 로힝야 사람들이 (버마인들과) 같은 자리에 앉지 못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미얀마는 1982년 개정된 시민권법에서 로힝야족의 인권을 제약했다. 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는 “로힝야 같은 소수민족들에게 시민권과 교육받을 권리, 공무원으로 일할 권리, 자유롭게 이동할 권리도 박탈했다”고 밝혔다. 아흐메드는 “내가 태어난 곳이기에 권리를 인정받을 수 있다면 미얀마 땅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대한적십자사·경향신문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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