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한 나무를 만났다

최선길 글·그림

남해의봄날 | 120쪽 | 2만5000원

늘 오가던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를 지나치다 보면 나무가 생명체라는 당연한 사실도 잊을 때가 많다. 40여년간 한국의 숲과 나무에 천착하던 저자는 강원 원주 반계리에 사는 수령 1318년 은행나무를 5년간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그리며 나무의 생명력을 좇는다.

거리를 이루는 다른 구조물과 나무가 다른 건, 시간과 날씨, 계절의 변화를 겪는 동안 풍화하기만 하지 않고 변화를 극복하며 자라난다는 점이다. 같은 시간대에 같은 나무를 바라보더라도 나무가 보이는 모습은 날마다 다르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매 순간 절대의 세계와 만나는 경험”이라던 저자는 그런 나무를 보며 종교적 깨달음을 얻는다.

성경 구절을 보다 “아, 성경이 말하는 나무는 사람이구나!”라고 느끼며 나무를 그리기 시작했고, 한없이 나무를 바라보다 “보고 싶은 대로(관념) 보는 게 아니라 보이는 대로(인상) 볼 수 있게 되었다”며 ‘심무가애’(‘마음에 걸림이 없다’는 뜻의 불교 용어)를 읊는다. 물아일체의 경지에도 이른 듯하다. “나무가 나를 그렸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비운다는 게 이런 건가.”

반계리 은행나무뿐 아니라 멀리서 보는 산등성이부터 산길의 풍경까지 다양한 필체의 그림들이 책을 채웠다. 같은 나무를 그린 그림끼리도 색채나 붓질의 차이가 느껴진다. 유화가 주를 이루지만 수채화나, 목탄으로 나뭇가지를 머리카락처럼 거칠게 그린 그림도 더해져 보는 재미를 준다. 저자의 그림 56점과 작업 노트를 엮은 책은, 관찰일기처럼 시간이나 계절의 순서에 따라 보는 이를 안내하지는 않는다. 나무와 자연을 그린 그림, 저자의 깨달음 사이 적지 않은 빈 곳을 독자들이 몰입하며 음미하게끔 한다.

작가 최선길이 그린 원주 반계리 은행나무의 모습. 남해의봄날 제공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