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목표’로만 남는 ‘주거안정’

집 소유 여부, 계층 간 불평등 ‘페달’로
정치권, 세입자 불만 ‘문구’로만 이용
정작 귀 기울이는 건 집주인들 목소리
집이 자산 증식 수단 안 되게 하려면
중장기적 철학 담은 정책 만들어내야

IT업계 디자이너 A씨(33). 서울 서남권 원룸에 전세로 산다. 계약 만료를 1년쯤 앞두고 이사를 고민하고 있다. 서울 생활을 포기하고 경기도에 새 거처를 마련할 생각도 있지만, 적당한 시세의 집은 서울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셋방살이를 오래하는 건 싫지만, 낡은 집을 사면 분양주택 청약순위가 밀릴까봐 망설여진다.

전문직 직장인 B씨(33). 경기 남부 부모집에서 거주한다. 1시간반쯤 되는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 직장이 있는 서울에 집을 얻고 싶지만 결혼 때까지 결정을 미뤘다. 그사이 서울 집값은 치솟았고, 부모가 보유한 집은 그만큼 오르지 않았다. 가족 지원을 받기는 어려운 상황에서, 부모가 집을 가졌다는 이유로 청약순위에서 밀리는 것이 억울하다.

금융권 종사자 C씨(35). 아내와 서울 강북 신축 빌라에 전세를 얻었다. 비슷한 크기의 동네 빌라 전셋값이 1억원 더 올랐다고 한다. 자녀 계획이 현실화하면 더 넓은 집으로 가야 할 테고, 전셋값은 더 들 터. 서울에 계속 살 수 있다면 ‘자가보유’를 고집할 생각은 없지만 ‘셋방살이로 아이가 놀림당하면 어떡하나’란 생각에 마음이 착잡하다.

이들 30대 셋은 하는 일도, 생활 수준도, 처한 상황도 다르다. 그럼에도 머릿속 생각은 같다. ‘내 집을 갖고 싶지만 너무 어렵다. 부동산시장은 뭔가 잘못됐다.’ 문재인 정부를 포함한 거의 모든 정권은 ‘주거 안정’을 정책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목표가 이뤄졌다고 느끼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집은 거주 수단이자 자산 증식 수단으로 작용했고, 서울에 집을 가진 이들이 집값 상승의 혜택을 누리는 사이 그렇지 못한 이들의 ‘서울 집’ 소유는 더 멀어졌다. 그 와중에 집 소유 여력이 없는 이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힘을 잃어간다.

‘집’으로 갈린 중산층과 저소득층

한국의 주거정책은 1970년대 수도권 인구 집중과 함께 시작됐다. 일자리를 찾아 인구는 수도권으로 몰려들지만 주택은 충분치 않았다. 주택을 대량 공급할 재원이 없던 정부는 민간 건설사업자들에 의존했다. 이후 정부 주도 아래 주택공사 등 공공기관이 택지를 조성한 뒤, 건설사업자들은 이를 사들여 대규모 주거지를 형성했다. 사업자들이 사업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저렴한 소형 주택 대신 비싼 중·대형 아파트들을 양산하는 것을 정부는 막지 못했다.

1970년대엔 세금도 낮췄다. 김명수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교수는 책 <내 집에 갇힌 사회>에서 “1971년 조세 개편이 ‘자본 동원’ 대신 민간투자와 자본축적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이뤄졌고, 자산 소유계층의 조세 부담을 덜어주는 차원에서 보유세는 낮게 책정됐다. 양도소득세의 실효세율도 낮았다”고 지적했다. 중산층이 주택을 소유한 뒤 시세 차익을 늘릴 여지는 커졌다. 반면 저소득층에게 주거비 상승은 악재였다. 대규모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이 주거권을 보장하라며 저항했다. 철거민 중 일부는 신규주택 입주 신청권을 받았지만 이를 사들일 여력은 없었다. 분양가와 주택 시가 간 차익(프리미엄)은 중산층 이상 소득집단에 돌아갔다.

자가소유 가구 간에도 계층 간 불평등은 가속화됐다. 김명수 교수가 통계청 자료로 분석한 바에 따르면, 수도권 부채보유 자가소유 가구 중 최하 소득계층인 1분위의 처분가능소득 대비 부채 비율은 2016년 975%에 이르렀고, 순자산은 2010년 4억8600만원에서 2016년 2억7500만원으로 감소했다. 반면 최상 소득계층인 5분위의 순자산은 같은 기간 8억8000만원에서 10억800만원으로 증가했다. 김 교수는 “중상층 이상 소득집단은 자가소유권을 자산 극대화 추구 수단으로 삼았으나, 저소득층은 부족한 노동소득을 자가소유권에 의존하게 됐다”고 말했다.

주택금융이 발달하지 못한 1990년대 이전에도 집주인들은 전세보증금을 지렛대 삼아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반면 저소득층은 신용도도 높지 않고 중·고가 주택이라는 담보물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주택금융이 발달한 후에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집값이 오르다보니 투자보다는 안정적인 거주를 염두에 뒀던 가구마저 투자에 열을 올리지 않으면 집을 못 사는 상황이 벌어졌다.

목소리 커진 집주인, 조용한 세입자

자가소유에 대한 갈망은 전 세대·계층에 걸쳐 있으나 자가소유자가 크게 늘어나지는 않았다. 국토교통부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조사를 시작한 2006년부터 2019년까지 국내 자가보유율은 58.0~61.2% 수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 자가에서 거주하는 가구 비율인 자가점유율도 53.6%에서 58.0% 사이를 오간다. 주거난이 심한 수도권의 경우 같은 기간 자가보유율(51.4~56.8%)과 자가점유율(45.7~50.7%)이 더 떨어진다. 최은영 한국도시연구소 소장은 “사실상 자가를 보유할 수 있는 계층이 고착화된 상태”라고 말했다.

수도권 택지개발이 본격화되고 철거민 문제가 잦아들면서 벌어진 현상 중 하나는 세입자들의 분화다.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결집하는 철거민들은 흩어지고, 오히려 집주인들의 단체행동이 늘어났다. 차익을 얻을 수 있는 대형 재개발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파트 단지 주민들이 ‘집의 노후함’을 증명하고, 같은 단지에서 시세보다 낮은 가격에 주택이 거래되지 않도록 하는 담합도 벌어졌다. 반면 세입자들은 분화됐다. 전세살이를 ‘수도권 내 더 좋은 집·교육 환경을 얻기 위해’ 하는 가구와 ‘도저히 집을 살 여력이 없어서’ 하는 가구의 요구는 같을 수 없었다. 김명수 교수는 “한국의 주택 갈등은 무주택 세입자들의 불만을 밑바탕으로 삼지만, 갈등을 빚는 상대는 다주택 소유자, 개발·건설업자, 정부 등으로 다양하다”며 “갈등의 초점도 세금제도, 분양제도, 주택금융제도 등을 광범위하게 아우른다”고 말했다. 박동수 서울세입자협회 대표는 “한국에서는 자산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상승률이 높았고, 앞으로도 그러리란 기대치가 크다”며 “세입자도 ‘자가소유’라는 목표에 포획된다”고 말했다.

정치권도 세입자들의 불만을 정치적 수사로 이용하면서도 세입자보다 집주인의 이해관계에 귀 기울였다. 박동수 대표는 “현재 소선거구제 아래에서는 집값에 따라 언제든 밀려날 수 있는 세입자보다 지역에 오래 거주해온 집주인·땅주인들의 의견을 듣는다”고 지적했다. 국토부 주거실태조사를 보면 자가가구의 평균 거주기간은 10년을 넘는 반면 임차가구의 거주기간은 3년 안팎이다.

피해를 본 것은 청년·저소득층 등 주택 구매 여력이 적은 세입자들이다. 이들을 위한 임대주택 및 기숙사는 정치권의 협의와 의지가 있어야 조성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집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지역 주민들이 반발하고, 지역구 의원들은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 결과 주거약자들을 위한 공공주택은 크게 늘지 못했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은 “문재인 정부 출범 3년간 공공임대주택이 32만8000가구 늘었지만 20년 이상 거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은 15%뿐”이라고 주장했다. 정부가 공공임대주택 수에 포함한 매입·전세임대주택 같은 경우는 상대적으로 거주기간이 짧고 비용이 높아 공공임대 기능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이다.

‘주택 철학’부터 합의해야

문재인 정부도 여느 정부처럼 ‘주거 안정’을 목표로 내세웠지만 현실화하지는 못했다. 집값을 잡으려 규제 지역을 지정했지만 비규제 지역 집값이 오르는 ‘풍선 효과’만 일으켰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지난해까지 정부의 부동산 정책은 단기 시장조절 정책에 머물렀다. 가격은 지표일 뿐 가격조정 자체가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선진국처럼 세금 및 금융규제를 일률적으로 적용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대책이 땜질식으로 나와 효과적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보다 근본적인 주거 정책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신경아 한림대 교수는 “강남 집값을 잡지 못하면, 서울 밖 거주자들의 주거조건을 최적화하는 식의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강수 교수도 “주거 정책에 대한 정부의 철학이 없는 게 큰 문제”라고 했다.

주거 문제는 저출생 및 세대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논의가 시급하기도 하다. 최은영 소장은 “50·60대가 갖고 있는 집을 20·30대에게 사라고 부추기는 상황이 벌어졌다. ‘영끌’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지만 실제 집을 살 수 있는 청년들은 한정돼 있다”며 “집값은 계속 오르는데 인구가 줄어들면 청년들이 무리해서 샀던 집을 높은 가격에 되살 사람이 장기적으로 없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공공주택 공급을 늘리는 것이 내 집에 대한 대중의 욕구와 배치되는 측면은 있다. 김명수 교수는 “공공주택 확충이든, 분양주택 확충이든 주택 정책의 중장기 철학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최은영 소장도 “자가에 사느냐, 세입자로 사느냐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한국 사회에서, 중장기적 주택 정책 철학에 대한 공론의 자리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