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겨눈 불빛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촛불과 휴대전화를 들어 보이고 있다. 강윤중 기자 yaja@kyunghyang.com




■울려 퍼진 헌법 1조…국정농단으로 금간 민주주의 회복 요구

시민 100만명이 지난 12일 서울 도심에서 촛불을 들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다. 이들은 한목소리로 “박근혜 퇴진”을 외쳤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의 원리를 천명하는 자리였다.

1500여개 시민사회단체로 구성된 ‘박근혜 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 등이 이날 오후 4시 광화문광장 일대에서 개최한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100만명(경찰 추산 26만명)이 참가했다. 시민들은 오후 5시부터 촛불을 들고 종로와 을지로, 율곡로 등을 누볐다.

시민들의 요구사항은 명료했다.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하나의 요구로 모아졌다. 시민들이 촛불과 함께 손에 든 팻말에는 대부분 ‘박근혜 퇴진’ ‘박근혜 하야하라’는 문구가 담겼다. 

시민들은 박 대통령의 ‘2선 후퇴’나 거국내각 구성보다 퇴진을 촉구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박 대통령의 2차 사과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분노는 임계점을 넘어선 상태였다.

시민들은 대통령 2선 후퇴와 퇴진 사이에서 고민하는 야당을 향해서도 쓴소리를 냈다. 직장인 김모씨(28)는 “100만명의 시민이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야당도 소극적인 자세로 눈치를 보지 말고 퇴진과 탄핵에 앞장서야 한다”고 말했다.

헌법 제1조 1·2항을 언급한 시민들도 많았다. 최영진씨(33)는 “추상적으로 느껴졌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헌법 1조가 이렇게 와닿은 적은 처음”이라며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할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방송인 김제동씨는 “이번 사태를 보며 3년 반 동안 진짜 대통령이 누구였는지 밝혀졌다. 진짜 대통령은 시민”이라며 헌법 1조를 시민들과 함께 외쳤다. 이날 촛불집회를 통해 시민들은 스스로가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임을 증명했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서 나온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 노래도 광장에 다시 울려퍼졌다. 이날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요구 촛불집회의 공식 행사도 이 노래를 제창하면서 마무리됐다. 

촛불문화제는 박 대통령이 퇴진 입장을 표명할 때까지 매주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오는 19일 4차 촛불문화제는 서울과 전국 각지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개최할 예정이다. 26일 5번째 집회는 ‘전국 집중 투쟁일’로 정해 대규모로 연다. 


■위대한 시민정신…자발적으로 참여, 비폭력 평화시위 주도

시민들은 ‘11·12 촛불항쟁’에서 평화적이고 성숙한 시위 문화 속에 위대한 시민정신을 보여줬다. 

다수의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평화적인 시위를 주도했다. 시민들은 행진 과정에서 “평화시위 합시다”라며 서로를 독려했다. 일부 과격 참가자를 향해 수시로 “비폭력”을 외쳤다. 도로에 떨어진 쓰레기를 스스로 주워담는 등 질서 있는 모습도 보였다.

12일 오후 4시 서울광장서 열린 총궐기 본 집회와 오후 5시부터 시작된 서울 도심 행진에는 주최 측 추산 100만명의 시민이 운집했다. 무질서 속 대규모 부상자 발생이 우려됐지만 중상자는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집회와 행진이 계속되며 호흡곤란 환자들이 발생했지만 시민들은 구급차와 들것이 진입할 수 있게 자발적으로 길을 텄다.

시민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분노의 구호를 외쳤지만 절제감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행진 과정에서는 끊임없이 “평화시위를 합시다” “경찰에게 욕하지 맙시다”라는 말이 외쳐졌다.

밤늦도록 경찰과 대치한 청와대 인근의 내자동 로터리에서도 다수의 시민들은 “경찰관과 싸우지 맙시다”며 일부 시위대를 자제시켰다. 시민들은 일부 시민이 경찰과 몸싸움하는 과정에서 뺏은 방패를 돌려줬다. 또 경찰 차량으로 올라간 일부 대학생을 향해서는 “내려와라”고 외쳤다. 경찰에게 촛불을 건네주는 시민도 눈에 띄었다.

이 같은 시민들의 모습에 경찰도 “비폭력” “비폭력” 구호를 외쳤다. 한 경찰 간부는 확성기를 들고 “일부 대학생을 시민 여러분이 좀 자제시켜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경찰이 13일 새벽 내자동 집회를 강제해산하며 23명의 연행자가 발생했지만 전날 본 행사에서는 단 한 명의 연행자도 없었다.

다양한 손팻말들이 집회 현장에서 배부된 탓에 쓰레기가 많았다. 하지만 시민들이 직접 쓰레기봉투를 사서 쓰레기를 줍는 등 스스로 질서 유지에 앞장섰다. 일부 시민들은 오후 10시30분 공식 행사가 끝난 직후 길바닥에 떨어진 촛농을 직접 긁어서 떼기도 했다.

시민들이 물밀듯이 밀려온 지하철 광화문역, 시청역, 종각역, 경복궁역 안에서도 시민들은 나란히 줄을 서서 이동했다. 일부 시민들은 “질서, 질서”를 외쳤다. 이날 집회와 문화제 비용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일부 충당했다. 



■모두가 하나였다…지역·세대·이념 구분 없이 역사의 물결 동참

지난 12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100만 촛불항쟁’에는 지역·세대·이념을 아우르는 시민들이 한데 모였다. 영남과 호남, 청년과 노인, 진보와 보수, 국내와 해외가 하나 돼 촛불의 물결에 동참했다.

이날 집회에는 전국 각지에서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경북 영주에서는 농민들이 전세버스 10대를 나눠 타고 서울로 올라왔고 경북 고령 농민회도 12일 오전 9시에 전세버스를 타고 출발해 이날 오후 2시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영남 지역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인 발걸음이다. 

광주·전남 지역에서도 이날 이른 오전부터 시민 2만여명이 전세버스 500대를 타고 서울로 출발했다. 경북 영주에서 온 김민정씨(36)는 “농민들 모두 화가 치밀어 올라 박근혜 퇴진을 요구하러 왔다”고 했다. 전남 강진에서 온 장종운씨(62)는 “온 국민이 지역, 이념을 가리지 않고 한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해 마음이 놓인다”고 말했다.

세대 간 갈등도 촛불 앞에서 녹아내렸다. 부산에서 올라왔다는 박상일씨(45)는 자유발언대에서 “젊은 분들에게 사죄하러 왔다”며 “지금의 시국이 되기까지 방조하고 모른 채 살았다.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이 자리에 나오는 걸 보고 눈물겹게 사죄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수능을 앞둔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공부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좋은 나라에 사는 게 우선이라 생각해 나왔다”고 쓴 손팻말을 들었다.

보수와 진보도 손을 잡았다. 부산 가덕도에서 왔다는 한 할머니는 공식 집회에 앞서 열린 ‘청년이 함께하는 만민공동회’에서 “평생 새누리당밖에 모르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지난 10년을 돌아보니 세상이 이게 아니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며 “그래서 정말 죄송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하자”고 외쳤다. 이 같은 발언에 진보적인 시민단체 회원들이 “할머니”를 연호했다.



해외에서도 “박근혜 대통령 퇴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미국 하버드대 한인 대학생·대학원생·연구원 등 193명과 뉴욕주 코넬대 한인 재학생 동문 111명은 12일 박 대통령 퇴진 요구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유럽과 아시아 지역의 한인들도 박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했다. 

독일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광장에는 12일 오후(현지시간) 300여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교포와 유학생들은 박 대통령과 최순실씨 얼굴 모양의 종이 마스크를 쓰고 나와 대통령 퇴진 구호를 외쳤다.

<정희완·노도현·김원진·윤승민·이진주 기자 mean@kyunghyang.com>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