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시위를 벌일 만큼 베네수엘라의 치안 상황은 불안하다. 베네수엘라의 한 비정부기구(NGO)는 2013년 살인율이 10만명당 79명이라고 추산했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는 지난 1월 외교·안보 보고서 ‘큰 판돈과 검은 백조’(Big Bets & Black Swans)를 공개했다. 전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외교·안보 이슈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꼽아 분석한 이 보고서에 ‘베네수엘라가 폭력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높은 물가상승률 등 베네수엘라가 겪고 있는 경제위기 때문에 국민들의 불만이 쌓이고, 그 불만이 폭력사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함께 실렸다. 보고서는 “폭력 발생의 위험은 여전히 낮다”면서도 “베네수엘라 전역에서 일어난 생필품 부족 현상 등 여러 문제 때문에 몇 달 뒤에는 폭력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예측했다. 이 예측은 어느 정도 들어맞았다. 시기가 생각보다 다소 앞당겨졌을 뿐, 전국에 걸쳐 일어난 폭력사태는 결국 현실이 됐다.

2월 26일 베네수엘라 반정부 시위대가 수도 카라카스에서 행진하고 있다. _ 카라카스 신화연합뉴스

항의시위로 수많은 사상자 발생

발단은 지난 2월 4일 서부 타치라주 산크리스토발에서 벌어진 대학생 시위였다. 대학들이 밀집한 산크리스토발의 한 캠퍼스에서 한 여성이 성폭행을 당할 뻔하자, 대학생들이 국내 치안 상황에 대한 불만으로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이 불안한 치안 상황에 대해 대책을 마련하라고 했지만 상황이 전혀 나아지지 않아 국민들이 불안해하던 터였다. 그러나 정부는 오히려 시위 참가자들을 연행하는 등 강경한 대응으로 맞섰다. 연행된 시위자들을 풀어달라고 시위를 하면, 그 시위자들을 다시 연행하는 일이 계속됐다.


거듭된 시위는 급기야 지난 2월 12일, 수도 카라카스를 비롯한 전국에서 대규모 시위로 번졌다. 시위는 친정부 측 대 반정부 측의 충돌로 이어졌고, 대규모 폭력사태로 번져 이날에만 3명이 숨졌다. 반정부 시위 참여자들은 ‘콜렉티보스’(colectivos)라 불리는 친정부 무장세력이 발포해 사상자가 발생했다며 정부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시위를 독려했던 레오폴도 로페스 민중의지당 대표, 지난해 4월 대선에서 마두로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한 엔리케 카프릴레스 미란다 주지사 등 야권 지도자들까지 시위 전면에 나서며 판은 더 커졌다. 


18일에는 지역 미인대회 입상자 출신 여대생이 시위에 참여하다 머리에 총을 맞아 숨지는 등 사상자도 점차 늘었다. 정부는 반정부 시위로 인해 2월 24일까지 최소 13명이 숨졌으며, 약 150명이 다쳤다고 밝혔다. 이날까지 구금된 인원이 45명, 연행된 인원수가 529명이라고 정부는 덧붙였다. 


마두로는 이번 시위를 ‘네오파시스트의 소행’이라고 거듭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마두로의 주장과 달리 거리에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길 한편에 폭탄을 쌓는 사람들은 학생, 교사, 사업가 등 다양한 시민들이다.


2월 15일 예술가 니콜라이 샤마니카가 수도 카라카스에 있는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 벽화를 고쳐 그리고 있다. _ AP연합뉴스

자신의 직업을 안경 도매상이라고 밝힌 산크리스토발 시민 카를로스 알비아레스(39)는 뉴욕타임스에 “우리는 보통 사람이지만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손에 돌을 들고 나서게 됐다”고 말했다. “더 이상의 범죄는 안 된다. 정부는 물러나라”고 외친 이스베스 삼브라노(39)는 자신의 두 아이가 자주 뛰어놀곤 했던 골목 주변에 맥주 상자를 놓고 폭탄을 쌓았다. 


국민들이 정부를 상대로 시위를 벌일 만큼 베네수엘라의 치안 상황은 불안하다. 지난 1월 6일에는 2004년 미스 베네수엘라였던 모니카 스페아르가 자신의 남편과 함께 북부 카라보보주 푸에르토카베요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져 국민들을 충격에 몰아넣었다. 시위가 한창 진행 중이던 2월 25일에도 전 세계권투협회(WBA) 페더급 챔피언인 안토니오 세르베뇨가 총에 맞아 숨졌다. 


베네수엘라의 한 비정부기구(NGO)는 2013년 살인율이 10만명당 79명이라고 추산했다. 이 수치는 1998년에 비해 4배나 높고, 불과 3년 전인 2010년보다도 1.8배 높다. 살인율이 10만명당 91명인 온두라스 말고는 살인율이 더 높은 나라를 손에 꼽을 정도로 베네수엘라의 치안 불안은 심각한 수준이다.


물가 폭등 경제난도 사태 유발 원인 


경제난도 이번 사태를 일으킨 요인으로 꼽힌다. 지난 1년간 베네수엘라 물가는 56%나 올랐다. 우유와 화장지 등 기본적인 생필품도 잘 공급되지 않고 있다. 마두로는 전임자이자 중남미 정치의 ‘아이콘’이었던 우고 차베스를 따라 ‘경제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외환을 통제하고 소매 체인에는 강제 가격인하를 명령했다. 


급기야 마두로는 국회의 동의 없이도 법을 입안할 수 있게 하는 수권법을 지난해 11월 통과시켰다. 하지만 베네수엘라의 경제 상황이 나아졌다는 소식은 어디서도 들을 수 없었다. 마두로는 시위 원인을 미국에도 돌리고 있다. 2월 17일에는 시위대와 공모했다는 이유를 들어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직원 3명을 추방했다. 


마두로는 CNN 등 미국 방송들이 사태를 악의적으로 보도한다고 비난했고,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는 “직접 와서 진실을 보라”며 대화를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이 자국에 있던 베네수엘라 외교관 3명을 내쫓으며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베네수엘라는 사실상 외교관계가 끊어져 6년 동안 공석이던 주미대사를 새로 임명하는 등 태도를 바꿨다. 


외신의 보도 행태를 왜곡이라 비난했지만 정작 베네수엘라도 보도 통제를 일삼고 있다. 시위를 보도하는 텔레비전 방송 송출을 막는가 하면, 외신기자들이 정보를 전달하는 트위터,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접속까지도 일시적으로 막았다. ‘차베스가 직접 지명한 후계자’라는 점을 등에 업고 대통령에 당선된 마두로는 그 후광 외에는 지금까지 국내 문제에 뾰족한 해결방안을 보여주지 못했다. 


높은 물가 등 여러 경제지표가 좋지 않은 가운데도 차베스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지지를 유지했지만, 마두로에겐 차베스 같은 카리스마가 없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매년 12월 8일을 차베스 국경일로 지정한 것, 경제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수권법을 제정한 차베스의 정책을 답습한 것 등 마두로는 차베스를 떠올리게 하는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마두로는 집권 이후 가장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심지어 마두로와 같은 편에서도 현재 상황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집권 통합사회당 소속인 타치라주의 호세 비엘마 주지사는 24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평화가 우선이다. 구금한 시위자들을 집으로 보내라”고 촉구했다. 1992년 차베스가 시도했던 쿠데타에 참여했던 비엘마는 마두로와 마찬가지로 ‘차비스타’(차베스의 아이들)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 때문에 비엘마의 비판은 큰 주목을 받았다. 


안팎으로 수세에 몰린 마두로는 22일 야권에 평화회의를 열자고 제안했으나 카프릴레스는 “마두로에게 좋아 보이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마두로의 대화 제의를 단칼에 거부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