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헌정 안착, 여성의원 할당제, 8%대 성장 등 ‘환골탈태’

ㆍ정부, 기금 조성에도 보상 부족… 책임자 처벌도 먼길

10년째 매년 8%씩 경제가 성장하는 나라, 정부와 비정부기구가 머리를 맞대고 헌법을 만든 나라,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 국회의원 비율이 절반이 넘는 나라, 열대우림 옆으로 광케이블이 지나가는 나라…. 

영화 <호텔 르완다>의 배경이 됐던 곳, 1994년 제노사이드(genocide·인종말살)를 겪은 아프리카 동남부의 내륙국 르완다다. 뉴욕타임스와 CNN방송 등 서방 언론들과 남아프리카공화국 SABC방송, 올아프리카닷컴 등 아프리카 현지 언론들은 오는 7일(현지시간) 제노사이드 20주년을 맞는 르완다의 놀라운 변화를 소개하며 “동아프리카의 새로운 경제 모델이 떠오르고 있다”고 전한다.

사람들은 르완다 하면 끔찍한 학살을 먼저 떠올리지만 20년 새 르완다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학살 이후 몇 년간의 과도기를 거쳐 2000년 폴 카가메 대통령이 집권했고, 2003년에는 새 헌법이 만들어졌다. 

헌법위원회는 국제기구들과 르완다 시민단체들, 주민 대표들의 의견을 모아 세계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을 만들었다. 여성들에게 의석 30%를 할당한다는 의무할당제 조항이 그중 한 예다. 카가메의 정치스타일이 권위주의적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그가 집권한 이래 참사의 빌미가 된 종족 간 충돌은 거의 사라졌고, 정국은 예상보다 빨리 안정됐다.

■ ‘자원의 덫’ 피해 관광·정보기술산업에 올인

무엇보다 르완다 경제는 10년째 꾸준히 고속성장을 하고 있다. 나이지리아나 콩고민주공화국 같은 자원 부국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 덕에 자원 수출로 연명하다가 저개발국으로 머무는 ‘자원의 덫’을 피해나갈 수 있었다. 내전 뒤 들어온 서방의 원조금은 3차산업을 키우는 데 효과적으로 쓰였다. 지구상에 몇 안 남은 열대우림을 보호하면서 세계적 희귀종인 로랜드고릴라 트레킹 등의 관광산업을 일으켰다. 작은 내륙국이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바꿔 지역의 정보기술(IT) 허브로 성장하기 위해 투자했다. 전국에 걸쳐 1600㎞의 광케이블을 설치했고, 지난해에는 국민의 95%가 4세대(4G) 통신망을 쓸 수 있게 하는 통신망 구축 사업을 시작했다.

삶의 질도 나아지고 있다. 정부는 지출의 4분의 1을 교육 부문에 투자하고 있다. 2001년 59%였던 빈곤층 비율은 10년 만에 44.9%로 떨어졌다. 여전히 빈곤율은 높지만 국민의 90% 이상이 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다. 1994년 6%가 넘던 성인 에이즈 환자 비율은 3% 밑으로 떨어졌다. 최근 10년간 평균기대수명도 10년 늘었다. 환경오염을 줄이려 비닐봉지 사용을 전면 금지한 것은 르완다가 세계 최초다. 미국 컨설팅회사 AT커니는 최근 아프리카에서 가장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르완다를 꼽았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23일 중국 성장세가 줄고 신흥시장이 불안해지자 르완다가 투자대상으로 각광받고 있다고 보도했다.


■ 세계에 충격 안긴 ‘인종말살’

나치의 유대인 학살 악몽이 채 가시지 않은 1948년, 유엔은 ‘인종학살 범죄의 예방과 처벌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의 시대는 끝났다고 믿었던 20세기 말의 지구촌에서 또다시 가장 잔인하고 조직적이고 야만적인 인종말살이 벌어졌다. 정권을 쥐고 있던 후투족 강경파가 비행기 사고로 숨진 쥐베날 하브자리마나 대통령의 사망을 툿시(투치)족의 소행으로 돌리고 인종학살을 시작했다. 대통령 사망 하루 만에 후투족은 무고한 툿시족을 사냥하듯 학살했다.

정부 엘리트들은 살생부를 만들어 표적살해를 했고, 민병대에 무기를 공급해 대량살상을 조종했다. 이미 그 전부터 정부는 라디오방송 등을 통해 종족 갈등을 부추기고 있었다. 학살이 시작되자 이들 언론은 살상을 선동했다. 선동에 넘어간 후투족은 전날까지 어울려 살던 이웃을 살해하며 학살에 가담했다. 툿시족 반군조직 르완다애국전선(RPF)이 수도를 장악하기까지 학살은 석 달간 이어져 100만명이 목숨을 잃었다. 최근 영국을 방문한 루이즈 무시키와보 르완다 외교장관은 학살 사망자가 공식 집계상 100만50명이라고 밝혔다. 여기엔 툿시족의 보복에 희생된 후투족 사망자도 포함돼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세계는 국가 간 전쟁과는 다른 대규모 폭력의 위험성을 깨닫게 됐으며, 제노사이드라는 말이 일반화됐다.

또한 르완다 제노사이드는 유럽국들의 아프리카 식민지배를 돌아보게 했다. 르완다를 식민지배한 벨기에는 편의상 소수파인 툿시족에게 권력을 나눠줬는데, 이것이 르완다 독립 뒤 후투족의 패권주의와 툿시족에 대한 반감을 불렀다. 또 열강의 편의대로 그어진 국경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형성된 현지 부족·민족들의 경계선과 일치하지 않았다. 르완다의 두 종족은 이 때문에 이웃한 부룬디 등의 형제부족과 손잡고 수시로 싸웠다. 식민 시기부터 신분증에 표기된 종족 구분은 후투족이 툿시족을 가려내 학살하는 데 쓰였다.

■ 여전히 남은 상처, 계속되는 제노사이드

상처가 깊은 만큼 치료가 쉽지는 않다. 1995년 유엔 주관으로 탄자니아 아루샤에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ICTR)가 세워졌고, 1998년에는 국제 사법 사상 처음으로 학살자 장-폴 아카예수가 제노사이드 죄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올해 말 재판소 활동이 끝나는데, 아직 반인도범죄자 처벌은 완료되지 않았다. 지난 2월 국외로 도망간 학살범 파스칼 심비캉와의 재판이 프랑스에서 시작되기도 했다. 피해자 보상도 요원하다. 정부가 생존자들을 위한 기금을 만들었지만 보상 성과는 미미하다.

정부는 제노사이드 20주년을 맞아 ‘퀴부카(기억)’라는 이름의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다. 르완다 뉴타임스 등은 “젊은이들이 역사를 기억하게 해야 한다”며 비극의 의미와 화해를 연일 강조하고 있다. 르완다는 힘겹게 아픔을 딛고 나아가고 있지만, 제노사이드의 그늘은 여전히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특히 나이지리아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에서는 여전히 종족말살에 가까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르완다 정부는 웹사이트에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제노사이드는 르완다인들만 풀어가야 할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애에 반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