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경아 신영증권 연구위원(43)이 지난달 21일 발표한 보고서에 연말 증권가가 발칵 뒤집혔다. 운송·조선 분야를 담당해 온 그는 하림그룹이 대형 해운사 HMM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자 하림 계열 해운사인 “팬오션에 대한 분석을 중단한다”며 HMM 주식에 ‘매도’ 투자의견을 낸 것이다. 주식시장 투자 규모가 커져 거래가 활성화될수록 득을 보는 증권사 사정상 소속 애널리스트는 종목 관련 보고서에 ‘중립’ 투자 의견을 표방하긴 해도 ‘매도’ 의견을 공표한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보고서에 “‘승자의 저주’를 예상했던 (하림의) 팬오션 인수 1년 뒤 ‘신의 한 수’라고 평가가 뒤바뀌었던 그 일이 반복되길 바란다”라며 자신의 분석이 틀리기를 바란다는 취지의 직설적인 표현도 담았다. 파장은 작지 않았다.
지난 16일 서울 여의도 신영증권사에서 만난 엄 연구위원은 보고서가 화제가 된 후 “10년 동안 연락이 안 됐던 주변 분들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연말 보고서가 뜸한 시기에 나왔던 것이라 더 화제가 된 게 아닌가 싶다”면서도 “확실한 의사 표현을 하는 게 투자자에게 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보고서를 썼다”고 말했다.
그의 보고서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다른 직설적인 보고서들과 엮여 더 화제가 됐다. 김홍식 하나증권 연구위원은 지난달 21일 KT 종목 보고서 제목을 “이걸 굳이 왜 사요”라고 달았다. 김승준 하나증권 연구위원은 지난 4일 태영건설에 이어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위기를 겪을 건설사의 이름을 보고서에 명시했다가 삭제한 것으로 알려졌다. 눈치 안 보고 할 말을 다 한다는 ‘MZ세대’의 특성이 반영됐다는 말까지 돌았다.
하지만 엄 연구위원은 “증권가에선 ‘셋 중 두 명은 MZ세대가 아닌 것 같다’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며 “업력이 짧은 사람은 눈치를 안 보기 어렵지만 시장의 생리를 조금 알고, ‘이 정도까지는 얘기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드는 사람은 소신껏 의견을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엄 연구위원은 운송과 해운·조선 분야만 10년 넘게 분석한, 리서치센터 내 팀장급인 베테랑 애널리스트다. 그는 “해운·조선업은 최근 20년 사이에 구조조정이 많았다. 다른 업종으로 치면 회사가 없어지는 것 같은 상황도 있었다”며 “매수 의견만 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확실한 의사 표현을 해 주는 게 투자자에게 덜 피해를 줄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보고서에 제 개인적 특성이 녹아들었을지 모른다”며 “저희 하우스(리서치센터)에서 제가 유일하게 매도 보고서를 써 봤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단 있는 본래 성격에 다년간 축적된 경험이 소신 보고서의 밑거름이 됐다는 것이다.
신영증권 리서치센터가 2022년과 지난해 연달아 낸 자기반성격 보고서 ‘나의 실수’도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엄 연구위원은 “(센터에서) 아닌 건 아니었다고 (연말마다) 짚고 넘어가자고 하시니 한 번 더 (과거 예측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식시장에 개인 투자자들이 관심이 많아지면서 전보다 이해 안 되는 항의를 들을 때도 있다”며 “특정 기업에 대한 부정적인 의견을 내면 해당 애널리스트들의 기업 탐방을 막거나 미팅 일정을 배타적으로 잡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소신 있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환경이 앞으로 마련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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