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9) 브라질 포르탈레자 ‘기적의 은행’

▲ 도시개발에 쫓겨난 이주민 ‘가난 이기자’ 주민연합 조성
초기 5곳서만 통용 ‘파우마’ 지금은 240여개 상점서 거래
마을 내 소비 20%→93%로 경제활동 선순환 이뤄져

▲ “가난한 마을이 잘살려면 경제적 연대가 필수적” 
2년마다 ‘소비·생산지도’… 업종 중복 때 대체 권유
창업에 필요한 지식 교육… 대출 상환율 93% 달해


브라질 북동부 포르탈레자는 해안 관광도시다. 백사장과 야자수가 해마다 2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을 유혹한다. 바닷가 파라솔 뒤에는 최신식 호텔들이 즐비하다. 빈민들이 만든 ‘기적의 은행’ 파우마스는 이 해안에서 내륙으로 23㎞ 떨어진 마을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에 있다. 버스를 3번이나 갈아타고 콘준토 파우메이라스로 가는 사이, 창밖의 풍경은 어느 순간 허름한 벽돌집과 공터들로 변하기 시작했다. 차창 뒤를 돌아보니 해안 끄트머리에 병풍처럼 늘어선 빌딩숲이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해안과 이곳 사이에 보이지 않는 유리벽이 쳐져 있는 것 같았다.

버스는 황량한 마을 한복판에 멈췄다. 풍족한 것이라곤 뜨거운 햇살밖에 없는 듯했다. 한 시간 전 바라본 바닷가와 이 마을이 같은 도시에 속한 곳이 맞을까. 노란 2층 건물이 눈에 띄었다. 외벽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누구도 가난을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다. 변두리 은행, 이건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의 은행이야!’ 인구 3만명의 빈민촌을 세계가 주목하게 만든 파우마스 은행이었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 마을 전경.


■ 버림받은 자들의 마을 ‘콘준토 파우메이라스’ 

도시 개발은 종종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한다. 빌딩을 짓고 도로를 놓는 일은 원래 그곳에 살던 가난한 사람들을 쫓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는 도시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 모여든 곳이다. 주민 대다수는 1970년대 초까지 포르탈레자 해안에 살던 가난한 어부들이었다. 정부가 이곳이 가진 관광자원으로서의 가치를 깨닫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시 당국은 1973년 이 지역의 파벨라도스(슬럼 주민을 지칭하는 경멸적 용어)를 교외로 강제 이주시키고 도시 개발을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추방된 원주민들은 포르탈레자 교외의 습지와 공터를 할당받았다. 전기와 수도, 대중교통은 물론 집도, 학교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1973~1981년 내륙 농촌에서 이주해온 사람들로 마을 인구는 빠르게 늘었다. 포르탈레자의 깨끗한 거리와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에 취한 사람들은 더 이상 그들을 기억하지 않았다.

주민들은 스스로 뭉쳐야 했다. ‘누구도 가난을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1981년 ‘콘준토 파우메이라스 주민연합’이라는 주민회를 조직했다. 진보적인 가톨릭 교회와 국제 비정부기구(NGO)들도 돕기 시작했다. 주민연합의 1차 목표는 수도, 전력, 도로 등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시 정부를 압박해 예산을 따오고 국제기구의 지원을 받아 더디지만 조금씩 마을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학교를 지을 벽돌을 날랐다. 주민연합이 조직된 후 7년이 지난 1988년 처음으로 마을에 수도가 놓였고,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990년대 말에는 파벨라(슬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이들 앞에는 더 큰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을이 도시의 꼴을 갖추자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에서조차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당시 주민의 90%는 가구당 소득이 하루 7달러 미만인 빈곤층이었으며 75%는 문맹이었다. 인프라가 갖춰진 지 1년 만에 가옥세와 토지세, 수도료를 낼 수 없는 주민 30%가 이곳을 떠났다. 1997년 주민연합은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그들의 고민은 16년 전 출범할 때와 똑같았다. “우리 모두가 이 마을에서 계속 함께 살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았다. “우리는 도대체 왜 이렇게 가난한가.”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은 돈이 없었고, 그나마 번 돈의 대부분을 마을 밖에서 썼다. 여전히 마을은 경제의 선순환이 이뤄지지 않는 ‘껍데기’였다. 그래서 나온 결론이 은행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지역 단체가 기증한 2000헤알의 기부금으로 시작한 이 공동체 은행은 마을 내 생산과 소비의 불쏘시개가 돼주기 위해 태어났다.

헤알화, 파우마로 교환하는 주민들 지난 2월2일 파우마스 은행 직원(오른쪽)이 브라질 공식 화폐인 헤알화를 파우마스 은행이 발행하는 지역화폐인 ‘파우마’로 교환해주고 있다. 파우마와 헤알은 1 대 1로 교환되며 파우마스 은행과 계약한 마을 내 상점에서만 통용된다.


■ 지역화폐 ‘파우마’를 체험하다

지난 2월2일 파우마스 은행을 방문한 취재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브라질 화폐 ‘헤알’을 파우마스 은행이 발행하는 지역화폐 ‘파우마’로 바꾼 것이었다. 

50헤알(약 1만7000원)을 건네니 50파우마가 돌아왔다. 헤알과 1대1로 교환되는 파우마는 파우마스 은행과 계약한 마을 안 상점에서만 통용된다.

파우마를 다시 헤알로 바꿀 때에는 2%의 관리비용을 공제한다.

처음에는 종이로 카드를 만들어 5개 상점에서 소꿉장난처럼 출발했던 것이 지금은 주유소, 약국, 마트 등 240여개의 상점으로 확대됐다. 파우마가 정착될 수 있었던 것은 은행의 산파 역할을 맡았던 조아킴 지 멜루의 신망 덕분이었다. 

가톨릭 사제로서 사회운동에 헌신해온 그는 1980년대 주민연합에 합류했다. 멜루는 “1997년 당시 주민들은 돈의 80%를 마을 밖에서 썼다”면서 “지역 경제를 살리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총생산량보다 ‘돈의 흐름’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우리의 첫번째 목표는 사람들이 마을 안에서 돈을 쓰도록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려면 상인들의 협조가 절실했다. 멜루를 비롯한 주민연합 원로들이 상인들을 직접 설득하러 다녔다. 파우마스 은행에서 대출을 받을 때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유인책도 마련했다. 멜루는 “파우마가 정착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주민연합의 성과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신뢰였다”고 말했다. 그 신뢰가 은행에 대한 신뢰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는 “자신들의 아이디어로 만들어진 은행을 살리고 마을을 발전시키자는 것에 모두가 자발적으로 동참했다”고 말했다.

식당에서 밥을 먹은 후 주인에게 “파우마로 계산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주인은 환하게 웃으며 “얼마든지 된다”고 답했다. 마을에서 가장 큰 마트의 매니저인 엘리스 안젤라(37)는 “우리는 파우마와 헤알을 전혀 차별하지 않는다”며 “벌어들인 파우마로는 파우마스 은행에 전기요금과 세금을 내는 데 쓴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파우마를 받았지만 이제는 받지 않는다는 가게들도 있다. 멜루는 “파우마 사용률이 초기보다 많이 줄어든 것은 경제 규모가 성장하면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파우마는 마을 내 소비를 진작시키기 위한 도구였으며 그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말했다. 실제 1997년 20%에 불과했던 지역 내 소비 비중은 2011년 93%로까지 증가했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의 한 마트 직원이 지역화폐인 ‘파우마’로 물건값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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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준토 파우메이라스 청년들이 파우마스 은행에서 컴퓨터 교육을 받고 있다.


■ 파우마스 은행이 그리는 소비와 생산의 지도

파우마스는 은행의 역할을 넘어 마을 경제공동체를 아우르는 ‘기획재정부’ 역할을 담당한다. 마을 청년들을 고용해 2년마다 한 번씩 지역 내에서 생산되는 모든 물품의 종류와 양, 지역 주민들의 씀씀이와 소비 내용을 조사해 ‘소비·생산 지도’를 그리는 것이 그 핵심이다. 이 지도는 파우마스 은행이 주민들에게 창업 대출을 하고 직업교육을 할 때 소중한 자료로 쓰인다. 멜루는 “가난한 마을이 함께 잘살려면 경제적 연대가 필수적”이라며 “누군가 이미 있는 가게보다 더 크고 좋은 가게를 내도록 돕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파우마스 은행은 제도권 은행의 문턱을 넘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0~3%의 낮은 금리로 창업 대출을 해준다. 이때 ‘소비·생산 지도’를 바탕으로 이들의 창업 계획을 검토한 후 기존 사업과 중복되면 업종을 바꾸도록 설득한다. 한국에서처럼 이미 포화상태인 치킨가게를 열고 싶다고 대출을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 “목 좋은 곳에 더 크고 좋은 인테리어를 갖춘 치킨가게를 열라”고 하기보다는, 치킨 포장박스를 생산하는 사업을 권유해 상생할 수 있도록 조율해 주는 것이다.

일례로 파우마스 은행은 지역 청년들이 컴퓨터 기술을 배우기 위해 다른 지역까지 힘들게 버스를 갈아타고 다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에는 컴퓨터 기술 학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은행 측은 지역 내 한 슈퍼마켓 사장을 찾아가 컴퓨터 관련 분야로 업종을 확장하라고 권유했다. 이미 마을에 슈퍼마켓은 충분했기 때문이다. 슈퍼마켓 사장은 지금 성공적인 컴퓨터 학원 매니저가 됐다. 이처럼 세심한 업종 선택과 직업교육을 병행한 덕분에 파우마스 은행의 대출 상환율은 93%에 달한다.

파우마스 은행에서 우베란디아(35)라는 주부를 만났다. 버스 운전사인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아이들 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하지만 중졸 학력인 우베란디아가 찾을 수 있는 일거리는 흔치 않았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육은 정말 중요하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미리 돈을 모아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은행의 대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애당초 서류심사 자격이 되지 않았고, 이자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파우마스 은행 대출 광고를 봤다. 파우마스는 기꺼이 4000헤알을 빌려줬다. 파우마스는 마을 경제규모가 커지고 창업 업종이 다양해지면서 최근에는 헤알화로도 대출을 해준다.

우베란디아는 그 돈으로 향수가게를 열었다. 4년 만에 대출금을 모두 갚고 1000헤알을 저축했다. 지금은 파우마스 은행에서 여성 창업자들을 위해 운영 중인 회계 수업을 듣고 있다. 전문적인 지식을 쌓은 후 유명 제과 체인점을 열기 위해서다. 새 사업을 위한 대출 상담을 받던 그는 “파우마스 대출로 사업을 한 뒤 내가 얻은 것은 단순히 돈만이 아니다. 내 자신이 ‘강한 여자’라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우베란디아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콘준토 파우메이라스의 인상이 어땠냐”고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물어왔다. 해변과 너무 큰 격차가 느껴졌다고 솔직히 답하자, 그는 “맞다. 우리 마을은 더 많이 발전해야 한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이내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혹시 우리 마을에 슈퍼마켓이 얼마나 많은지 봤느냐. 이전에는 구멍가게도 없던 곳이다. 지금 우리 마을에 학교가 얼마나 많은지도 확인했느냐. 그건 아이들이 많다는 뜻이고 그만큼 우리에게 미래가 있다는 의미다.” 혼자서는 이겨낼 수 없는 가난을 힘을 합해 이겨낸 자들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었다.


<포르탈레자(브라질) | 글·사진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