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앰네스티 미국지부는 “이번 보고서에 드러난 고문과 실종, 인권 탄압에 대해 대통령과 의회가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국제법적 의무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매년 12월 10일은 세계 인권의 날이다. 1948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된 날이다. 이후 전 세계 국가들은 보편적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인권을 무시하는 단체와 정권은 국제사회의 지탄을 받았으며, 과거 정권의 인권유린 실태를 드러내는 시도들도 전 세계에서 끊이지 않고 있다.

세계 인권의 날을 하루 앞둔 12월 9일, 인권을 유린한 과거 고문 실태를 담은 보고서가 공개됐다. 정보기관은 테러 용의자로 지목받은 사람들에게 혐의를 자백받거나 정보를 얻으려고 익사에 가까운 물고문을 하거나, 잠을 안 재우기도 했으며, 발가벗긴 채 항문으로 물이나 음식물을 투입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2월 10일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세계 인권의 날’ 행사가 열린 가운데 한 인권운동가가 CIA가 자행한 고문에 항의하는 의미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시카고/신화연합뉴스

충격적인 CIA 고문실태 조사보고서
언뜻 보면 인권 개념이 미흡했던 19~20세기, 혹은 아직 독재·권위주의 정권 하에 있는 아프리카나 중동 국가에서 일어난 일들로 보인다. 그러나 보고서에 기록된 일들은 21세기,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저지른 것들이다.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의 주민 학살이 ‘인권 문제’라며 지난 8월 이라크 공습을 개시했던 미국 정부가 2001년 9·11 테러 직후 ‘향상된 신문 기법’을 승인해 가능했던 일들이다.

미국 연방 상원 정보위원회가 공개한 CIA 고문 실태조사 보고서는 CIA가 2002~2008년 총 119명을 테러 용의자로 잡아들였고, 이 가운데 39명이 고문을 당했다고 적시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9·11 테러 후 알 카에다 등 대규모 테러집단을 상대로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한 이후 테러집단과 연루됐다며 잡아들인 이들이다.

고문 기법의 존재는 부시도 2006년 인정한 바 있다. 9·11 테러가 일어난 지 약 5년이 지났을 때였다. 당시 부시는 ‘향상된 신문 기법’으로 명명된 고문 방법은 인간적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부시의 주장은 이번 보고서에서 거짓임이 드러났다. 고문 수법이 ‘인간적 방식’이기는커녕 비인간적으로 잔인했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180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한 달 동안 180회 이상 물고문을 당한 이들도 있었다. 밀폐된 상자 속에 곤충을 넣어 공포심을 유발한 고문 기법도 공개됐다. ‘직장(直腸) 급식’이라는 고문 기법도 보고서에 소개됐다. 말 그대로 항문을 통해 직장으로 물이나 음식을 강제 주입하는 방법인데, 신체조직이 찢어지고 만성출혈, 직장 탈출을 보인 수감자도 있었다.

고문이 테러 관련 정보를 취득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신빙성을 잃었다. CIA는 알 카에다 지도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의 은신처 정보를 고문 기법 덕분에 확보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보고서는 빈 라덴의 은신처는 CIA가 고문을 하기 이전에 나온 증언이었으며, CIA는 자신들이 원하는 거짓 자백을 받을 때까지 고문을 했다고 적었다. 상원 정보위는 CIA가 고문으로 얻은 정보들은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백악관과 의회, 언론이 효과를 과장했다고 지적했다.

미국 시민단체들 특별검사 수사 촉구
고문 대상 중에 테러와 무관한 이들도 있었다는 점 역시 보고서에서 드러났다. CIA가 체포한 119명 중 26명은 무고한 사람들이었으며, 이들 중에서도 7명이 고문을 피하지 못했다.

CIA는 이 같은 고문 프로그램에 총 3억 달러(약 3300억원)를 투자했다. 심리학자들과 1억8000만 달러(약 1990억원) 규모의 계약을 맺고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했다. 전 세계에 테러 용의자 비밀수용소를 설치하고 운영하는 데도 수백만 달러가 들었다. 민간단체 오픈소사이어티재단 보고서를 바탕으로 가디언이 12월 9일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최소 54개국이 CIA에 협력했고 이 중 21개국은 유럽에 있다.

공화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보고서 공개는 부당하며, 그 내용도 잘못됐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보고서 내용과 달리 실제로 고문 프로그램이 테러 방지에 도움이 됐다는 것이다. 존 브레넌 현 CIA 국장을 비롯한 전·현직 CIA 고위급 인사들도 잇따라 방송에 출연해 “고문 프로그램이 효과가 있었으며, 그에 대한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존 매케인 상원의원(공화당)은 “CIA의 신문 기법은 미국의 가치에 반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냈다.

보고서의 후폭풍은 거셌다. 미국 내에서는 전·현직 CIA 관계자들과 조지 W 부시 행정부를 기소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국제앰네스티 미국지부는 “이번 보고서에서 드러난 고문과 실종, 인권탄압에 대해 대통령과 의회가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은 국제법적 의무를 심각하게 위반하는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미국 시민단체들은 법무부가 특별검사를 임명해 인권범죄를 수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 세계에서도 비난여론이 줄을 이었다. 자이드 라드 알 후세인 유엔 인권 최고대표는 12월 10일 미국이 유엔 국제고문방지협약을 위반했다며 “고문에 관여한 미 정부 관계자와 CIA 요원을 기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유린 논란을 피하지 못하고 있는 중국과 이란도 미국을 비난했다. 북한도 “유엔은 (북한이 아니라) CIA가 저지른 반인도적 고문행위로 시선을 돌리는 게 나을 것”이라는 성명을 냈다.

그러나 미국 법무부는 보고서 공개 직후에도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어느 누구도 기소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냈다. 법무부는 2012년 CIA 고문 프로그램 관련 조사를 시작하면서 불처벌 방침을 밝혔는데, 이를 재확인한 것이다. 상원 외교위가 공개한 보고서에서도 고문을 자행한 CIA 요원 등의 이름은 지워져 있다.

CIA의 고문 프로그램을 지원했던 다른 나라들도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보고서에는 구체적인 정황이 지워졌으나, 태국과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국가가 실제 고문을 지원했다는 보도들이 이어졌다. 알렉산데르 크바시녜프스키 전 폴란드 대통령은 급기야 보고서가 공개된 뒤 CIA가 폴란드에서 비밀감옥을 운영했음을 알았다고 말했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라크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가 CIA의 비밀 수감자 이송을 매번 보고받았다는 영국 언론의 보도도 나왔다.

그러나 블레어를 비롯한 여러 당사자들과 국가들은 아직 고문 프로그램 가담을 인정하기보다는 침묵하고 있다. 자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피해를 입었을 중동 국가들도 별다른 입장을 내지 않았다. 이는 이들도 미국의 고문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자국민들을 상대로 고문을 자행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AP통신은 분석했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