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하청 줬을 뿐 노동환경 몰랐다” 보상금 절반도 못 채우고 미적

3600여명의 사상자를 낸 지난해 4월24일 방글라데시 사바르 라나플라자 참사는 방글라데시 봉제의류 산업의 그림자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국 월마트, 이탈리아 베네통, 아일랜드 프라이마크 등 30개 가까운 글로벌 브랜드가 라나플라자 입주 5개 공장에서 하청을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방글라데시에 진출한 글로벌 기업 전체에 책임론이 불거졌다.

▲ ‘인정하면 이미지 깎일라’ 비영리단체 통해 기부 빈축
노동자들 기업 책임에 무지… 공장주·정부 비난에 그쳐
“문제의식·IT 등 교육 위해 더 많은 보상금 필요” 지적


현지에 진출한 글로벌 의류 브랜드들은 프라이마크 등이 주축이 돼 방글라데시 정부, 노동단체 등과 함께 지난해 11월 ‘라나플라자 협약’을 맺고 피해자 보상금 마련을 위한 신탁기금 조성에 나섰다. 목표액은 4000만달러(약 415억원)다. 현재 지급되고 있거나 준비 중인 보상금 가운데 최대 규모다. 기금은 국제노동기구(ILO) 헌장 제121조(산업재해 보상에 대한 헌장)에 따라 라나플라자 참사 피해자들에게 집행된다. 방글라데시 대법관·국제 인권운동가 등을 중심으로 이달 초 결성된 조정위원회가 보상금 사용 방안을 구체적으로 결정한다. 지난 24일에는 기금 측이 참사 관련 노동자 2840명에게 배상금 5만타카(약 67만원)씩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기금 조성 이후 첫 집행이었다.

그러나 아직 신탁기금 조성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지난 24일까지 신탁기금에 모인 액수는 877만달러에 불과하다. 프라이마크가 추가 기부하기로 한 700만달러를 합해도 1600만달러 수준으로, 목표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않는다. 월마트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은 지난달 보상금 220만달러를 비영리단체인 브랙USA의 이름으로 내 빈축을 샀다. 라나플라자 협약에 참여한 노동단체 방글라데시노동연구소의 술탄 우딘 아흐메드 부사무국장은 지난 21일 수도 다카에서 경향신문과 만나 “글로벌 브랜드에 책임을 물으려 기금을 조성하고 참여를 유도했지만 그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늦다”면서 “기금 마련을 계기로 대외적 압력이 줄어들자 브랜드들이 보상금 마련을 늦추고 있다”고 말했다.


글로벌 브랜드들은 지금까지도 라나플라자 참사나 방글라데시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하청을 줬을 뿐 방글라데시의 노동환경은 몰랐다는 것이다. 그러나 노동단체 관계자들은 “20년간 방글라데시 의류산업에서 수익을 내오면서 노동환경에 대해 몰랐을 리가 없다”고 말한다. 인건비가 저렴해 많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방글라데시는 글로벌 브랜드의 주력 시장이다. 덕분에 의류산업은 방글라데시를 지탱하는 주력 산업이 됐으며, 420만명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지난해 의류산업 수출액은 235억달러(약 24조원)로, 방글라데시 총수출액(269억달러)의 87%나 차지했다.

피해자 보상이나 노동환경 개선에 들일 비용은 글로벌 브랜드의 막대한 수익에 견주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다. 이번 참사와 직접 관계가 없는 스웨덴 H&M의 지난해 매출은 1500억크로나(약 23조7000억원)로, 방글라데시 전체 수출액과 맞먹는다. 라나플라자 참사 이후에도 의류 수출량은 줄지 않고 있다. 지난해 4월 이후 10개월 동안의 의류 수출량(204억달러)도 이전 10개월(173억달러) 동안보다 오히려 늘었다. 그러나 술탄은 기업들이 노동환경 문제의 책임을 인정하면 이미지가 깎이고, 매출 감소로 이어질까 우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방글라데시의 노동환경을 사실상 방조해온 글로벌 브랜드들이 참사 이후에도 배상에 소극적인 까닭은 그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방글라데시 안에서 글로벌 기업에 대한 책임론은 거의 제기되지 않고 있다. 의류산업 구조의 최대 약자인 공장 노동자들이 글로벌 기업의 위치와 책임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술탄은 “노동자 대부분은 농업지역에서 살다왔다”며 “국제적인 무역흐름뿐 아니라 노동조합, 시민 사회의 역할까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의류산업구조의 맨 위에 있는 글로벌 브랜드가 아닌, 부당행위를 일삼는 공장주들과 이를 감시·처벌하지 못하는 정부에 더 큰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들이 미미하게나마 보상 움직임을 보인 것은 외신 보도와 해외 노동·시민단체가 제기한 항의 덕분이었다.

보상액수가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아불 후세인 방글라데시 직물의류노조 위원장은 “노동자들이 받아야 할 교육 비용까지 감안하면 1억달러 정도는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노동자들이 의류산업과 글로벌 브랜드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울 수 있도록 정보기술(IT) 접근에 대한 교육에 보상금이 쓰여야 한다고 덧붙였다. 노동연구소의 술탄도 “신탁기금 차원에서 더 많은 보상금을 모으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다음달부터 방글라데시 전역에서 글로벌 브랜드의 참여를 촉구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해외 언론이나 시민단체가 글로벌 브랜드를 압박했던 방법을 방글라데시에서도 사용하겠다는 것이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