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가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sosok.kompasiana.com)


 오른쪽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입니다. 왼쪽은 소위 '인도네시아의 오바마'로 떠오르고 있는 조코 위도도 현 자카르타 주지사입니다. 두상이나 헤어스타일이 묘하게 닮았네요. 어디까지나 '묘하게'입니다만.


 4월9일 총선, 7월 대선이 있는 인도네시아에서 요즘 가장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이 분입니다. 지난해부터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1위를 거의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3월14일에는 인도네시아 제1야당인 투쟁민주당의 대통령선거 후보로 지명됐습니다. 투쟁민주당은 전 대통령인 메가와티가 대표이기도 합니다. 메가와티의 대권 재도전 가능성도 제기됐지만 결국 조코위를 차기 대선주자로 뽑았습니다. 조코위의 지지율을 발판삼아 투쟁민주당의 총선표도 얻어보자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총선 공식 개표 결과는 5월에 발표되지만, 투표 직후 출구조사 결과가 나왔는데요. 그러나 투쟁민주당의 예상 득표율은 19%대에 그쳤습니다. 압도적인 승리를 거둘 것이라는 예상엔 못미친 것입니다. 공식 개표 결과가 나오고, 대선전이 본격화됐을 때 새로운 양상을 확인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유도요노, 메가와티, 수하르토, 수카르노… 대통령을 맡았던 인물들만 기억에 남는 인도네시아의 정치를 크게 훑어보려고 합니다.



* 네덜란드로부터의 독립, 수카르노


 - 인도네시아는 20세기 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처럼 '독립운동가'들이 일어났고 그 중 한 명이 수카르노입니다. 1927년 동료들과 함께 인도네시아국민당(PNI)을 창설하고, 인도네시아 독립, 제국주의·자본주의 타파를 주장합니다. 자연스레 네덜란드 식민 정부에 눈밖에 난 수카르노는 여러 섬에서 구금 생활을 이어갑니다. 


 특이한 점은 '일본의 힘을 빌려 서방을 몰아내자'고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인으로서 느끼는 반일감정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도 또다른 '제국주의' 국가였기에 그 발상이 참…. 그래서인지 1942년 인도네시아의 패권이 일본에 넘어간 이후, 수카르노는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에 힘을 보탭니다. 인도네시아 독립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인도네시아 수백만명이 일본의 '대동아공영'에 참여합니다. 인도네시아에 철도와 활주로를 놔주고, 쌀을 군용물자로 보태주는 등. 수카르노는 대신 독립주의 운동을 했다고는 합니다. 국민들은 당장 전쟁에 동원되고 있었습니다만.


 결과적으로는 인도네시아는 독립에 성공합니다. 1945년 일본이 패전국이 되면서, 한반도처럼 인도네시아도 독립국의 지위를 얻게 됩니다. 일본에게 인도네시아를 뺏겼던 네덜란드가 다시 인도네시아 점령을 노렸지만, 결국 1949년 인도네시아 독립을 인정하게 됩니다.


 수카르노는 첫 대통령이 되며 서구식 민주주의를 이식하려 합니다. 그러나 곧 "서구식 민주주의는 맞지 않는 것 같다"며 '교도 민주주의(guided democracy)'를 주창합니다. 아직 정치제도가 성숙하지 않은 탓에 대통령과 정부 '엘리트'에게 정당보다 더 많은 힘과 역할을 부여합니다. 진통도 생깁니다. 부통령이자 그의 정치적 동지이던 모함마드 하타가 정부를 떠납니다. 수마트라섬에서는 군부의 봉기가 벌어집니다.


 대외적으로 수카르노는 제3세계 국가들의 연합 선봉에 섭니다. 1955년 '반둥회의'에서 제3세계는 서방의 슈퍼파워들에 맞서기로 합의했습니다. 여전히 '반제국주의'를 표방하던 수카르노는 그러면서도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와 관계를 돈독히 합니다.


* 수하르토, 독재


 1965년 9월30일 쿠데타 이후 인도네시아의 통치권은 수하르토에게 넘어갑니다. 쿠데타 당시 수하르토가 이끌던 군부는 쿠데타가 인도네시아 공산당의 소행이라고 주장했고, 이후 공산당 진압에 들어갑니다. 당시 인도네시아 공산당은 소련·중국 외부 공산당 중 최대규모였습니다. 군부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고, 9월30일 군 장성 6명을 숨지게 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쿠데타는 실패로 돌아갔고, 수하르토와 군부는 곧 학살을 벌입니다. 공산당은 자취를 감췄습니다. 수도 자카르타뿐 아니라 자바섬, 발리섬까지 피의 물결이 번집니다. 1966년까지 50만명 정도가 숨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하르토는 이후 '새로운 질서'를 내건 정부를 출범시킵니다. 해외 투자를 유치해 인도네시아 경제가 성장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수하르토와 그의 가족들이 빼돌린 재산도 적지 않습니다. 그 기간 수십만명이 군사 독재 아래 숨지거나 구금됩니다. 동티모르에 내전을 일으키고 침공해 강제로 편입시키기도 했습니다.


 집권 당시부터 수하르토는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등에 업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듯 사회주의 세력이 점차 인도네시아에 커졌고, 그것을 막기 위해 미국 중앙정보국(CIA) 등이 수카르노 암살을 모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서방의 지원이 끊기자 수하르토도 결국 장기집권의 막을 내립니다.


* 민주화 운동, 경제 침체, 독재의 끝


 1996년부터 인도네시아에서 민주화 운동이 시작됩니다. 인도네시아 민주당(PDI)이 정부 지지에서 방향을 선회하던 때입니다. 당시 민주당 대표이자 수카르노의 딸인 메가와티가 정치 지도자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입니다. 수하르토와 정부가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내지만 시위는 계속됩니다. 이해 7월27일에 메가와티의 지지자들이 사망하거나 구금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 때부터 혁명바람이 불기 시작합니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동아시아 금융위기를 피하지 못합니다. 대형 기근과 산불도 이 때 인도네시아를 덮칩니다. 통화가치 하락에 수하르토 정부는 결국 IMF 구제금융을 신청합니다. 정부지출을 줄이면서 교육비 등 지원금이 끊기고, 이에 반발하는 대중 시위들이 일어납니다. 결국 수하르토는 1998년 5월21일 권좌에서 물러납니다.


* 수하르토 이후, 대통령 직선제에서 지금까지.


 이후 종교인 출신이자 수하르토에 반대목소리를 냈던 압둘라흐만 와히드가 1999년 5년임기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메가와티는 부통령 자리에 오릅니다. 새 정부는 민주화를 추진하며 경제 성장을 천명합니다. 하지만 경제 문제들은 끊이지 않았고, 아체 등 독립을 주장해오던 지역들과의 갈등도 계속됩니다. 부패 스캔들까지 터지자 결국 와히드는 2001년 7월 탄핵됩니다. 


 부통령인 메가와티가 와히드의 임기인 2004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정부의 부정부패와 정치적 무능에 대중들은 반발합니다. 이 때 현 대통령인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가 새 지도자로 떠오릅니다. 유도요노는 앞선 두 차례 정부에서 고위 관리직을 맡았다가 물러난 경험이 있습니다. 2001년에는 정부 비상사태 선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해임, 2004년 3월 대선을 앞두고는 정부 무능을 비판하며 해임됐다고 합니다. 때문에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2004년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사상 처음 국민 직접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 됩니다.


 유도요노는 2009년 다시 재선에 성공해 임기 10년을 채운 뒤 7월 대선으로 결정될 후임자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떠납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국민들은 여전히 현 정부에 대한 비판적입니다. 누가 대통령 자리에 오든 부정부패는 여전하고, 경제는 여러번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깨끗함'과 '행정력'을 갖춘 조코위가 새로운 지도자로 떠오른 듯 합니다. [관련기사]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