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8) 볼로냐·트렌토협동조합의 힘

▲ 주민 절반이 조합원
금융·농업·건설 등 모든 분야서 이뤄져


▲ 경제활동으로 쓴 돈 협동조합에 재투자
지역경제 활성·선순환


협동조합은 소규모 생산자나 소상공인, 소비자들 같은 경제적 취약계층들이 모여 서로 도와가며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경제조직이다. 협동조합이 창출해낸 이익은 자본가의 배를 불리는 대신 조합원과 시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온다. 도시 경제가 전부 협동조합으로 짜인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협동조합 도시 볼로냐와 트렌토 시민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요람에서 무덤까지 협동조합과 함께 살아간다.

지난 1월26일 이탈리아 에밀리아로마냐주의 주도 볼로냐를 찾았다. 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기사에게 볼로냐에 협동조합이 얼마나 많으냐고 묻자 “나도 택시협동조합 소속이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볼로냐 택시기사들은 회사에 소속되는 대신 협동조합을 만들어 일한다. ‘코타보’라는 이름의 택시조합은 1967년부터 운영됐다. 소속 기사는 81명이다. 조합은 공동 콜센터를 두고 있으며 차량 유지보수와 법률지원을 맡는다.


볼로냐 협동조합 마트 ‘이페르콥’ 1월26일 이탈리아 볼로냐의 ‘협동조합 마트’ 이페르콥에서 시민들이 장을 보고 있다. 볼로냐에는 이페르콥의 대형 매장 4곳이 있다. 시민들은 동네 가게에 가듯 협동조합 매장을 찾아 할인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다. 볼로냐 | 남지원 기자


■ 인구 절반이 조합원, ‘협동조합의 도시’ 트렌토

택시로 10분 정도 달려 ‘이페르콥(Ipercoop)’이라는 슈퍼마켓에 갔다. ‘협동조합 마트’라는 소개를 받고 왔기 때문에 한국의 대형마트와는 다를 거라고 기대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이페르콥은 서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형마트와 다를 바 없었다. 거대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니 베네통 같은 브랜드부터 안경점과 액세서리 가게, 전자제품 판매점 등이 입점해 있었다. 채소와 과일, 와인과 치즈, 생활용품 등 진열된 물품도 평범한 상점과 똑같았다. 

퇴근 후 장을 보러 온 롱카라티(43)의 바구니에는 채소 몇 종류와 청소용품, 비닐팩이 들어 있었다. 롱카라티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이 매장을 찾는다. 생필품은 모두 여기서 산다. 왜 협동조합 마트를 찾느냐고 묻자 그는 “물건은 다른 마트와 똑같지만 조합원으로 가입하면 훨씬 싸다”고 설명했다. 볼로냐에는 이페르콥의 대형 매장이 4개 있다. 조합원이 아니어도 물건을 살 수 있지만, 출자금을 내고 조합원이 되면 구매금액의 일부를 적립받거나 할인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다. 

볼로냐 시민들이 협동조합을 찾아 소비자조합원으로 가입하는 것은 한국의 대도시 사람들이 동네 마트의 적립카드를 만드는 것처럼 일상적이다. 하지만 두 행위가 의미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볼로냐 소비자들이 마트에서 쓴 돈은 마트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협동조합 영역에 투자된다. 이탈리아 법에 따라 협동조합은 조합원들에게 전체 이윤의 80%까지만 분배할 수 있다. 나머지는 반드시 조합 운영에 재투자해야 하고, 전체의 3%는 전국 규모의 협동조합기금에 적립해야 한다. 해산된 협동조합이 남긴 자금도 이 기금에 적립된다.

기금은 새 협동조합을 만들거나 이익을 내기 어려운 작은 협동조합을 지원하는 데 쓰인다. 시민들이 마트에서 쓴 돈이 경제의 선순환을 만들어내는 구조인 셈이다. 이런 구조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협동조합을 지원하고 키웠기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정부는 협동조합 형태로 기업을 꾸리는 이들에게 법인세 감면 등 여러 혜택을 준다. 지방정부도 협동조합 창립을 장려하고 지원금을 준다.

19세기부터 협동조합 경제를 발전시켜온 이탈리아에는 이런 도시들이 많다. 볼로냐 북쪽, 알프스 산자락의 작은 도시 트렌토는 명실상부 ‘협동조합의 도시’다. 기차역에서 나와 골목길을 걷는 동안 협동조합을 뜻하는 ‘cooperativa’라는 단어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슈퍼마켓과 카페, 은행, 심지어 하수도 공사를 하고 있던 건설회사조차 협동조합 이름을 달고 있다.

트렌토를 중심도시로 하는 트렌티노 지역의 인구는 50만명인데 2013년 기준으로 절반이 넘는 27만3000명이 협동조합 조합원이다. 트렌티노 전역의 협동조합 수는 533곳이나 된다. 19세기 후반 빈농들이 가톨릭 신부들을 중심으로 모여 협동조합을 꾸리고 연맹을 창설한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지금 트렌티노에는 금융과 농업, 소비자, 사회서비스 및 복지 등 다양한 영역에 협동조합이 구성돼 있다. 예금의 68%, 대출의 61%를 협동조합 은행이 담당한다. 농업협동조합 기업의 시장점유율은 90%나 된다. 1만5000명이 협동조합에 고용돼 일하고 있으며 순자산은 26억유로 규모다. 트렌티노 지역 총생산의 15%, 고용의 14%를 협동조합이 차지한다. 소비자 협동조합 매장 외에 일반 가게가 전혀 없는 마을도 193곳이나 된다.

1월26일 이탈리아 볼로냐의 협동조합 서점 코프 리브레리아에서 시민들이 서가를 둘러보고 있다. 볼로냐 | 남지원 기자


■ 코페르니쿠스가 교편 잡던 대학 옆엔 예스러운 ‘조합 책방’

노인 사회서비스와 문화사업을 하는 ‘스페스’는 트렌티노에서 가장 큰 협동조합 중 하나다. 요양원을 8곳 운영하고 있고 직원은 500명이나 된다. 스페스 관계자들은 “우리는 이윤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사회적인 목적을 가졌다는 점에서 일반 기업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스페스와 같은 큰 협동조합은 이익을 낼 수 있는 곳에서 벌어들인 돈을 수익성 없는 사업부문에 투자하고, 조합원들과 주민들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한다.

스페스는 트렌토 중심가에서 ‘바리첸트로’라는 이름의 식당 겸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채식 식사와 커피를 파는 레스토랑이기도 하지만 이 공간의 더 큰 목적은 주민들에게 ‘만남의 장소’가 되어주는 것이다. 1월27일 찾은 바리첸트로에는 이탈리아어와 아랍어 코스, 만화 그리기 모임, 어린이를 위한 재활용 천으로 공룡 꼬리 만들기 프로그램, 축구게임 모임, 집 밖에서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의 공부 모임에 참여하라는 안내물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햇볕 잘 드는 테이블에서는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네 사람이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 회색과 하늘색 털실을 섞어 양말을 뜨던 테오도라 베르티는 “7년째 겨울이 되면 매주 화요일 오후 4시30분에 여기 모여 뜨개질을 한다”고 모임을 소개했다. 뜨개질 같은 옛 가정 문화가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웠던 할머니들이 이 모임을 만들었고,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이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볼로냐의 볼로냐대학은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가 15세기 교편을 잡았던 곳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도 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11세기에 세워진 이 유서 깊은 대학 옆에는 ‘코프 리브레리아’라는 서점이 있다. 책을 많이 파는 것보다 좋은 책을 주민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라는 이 서점 역시 ‘조합 책방’이다. 시집 코너를 둘러보던 시인 도메니코 브란칼레(39)는 “코프 리브레리아는 작은 동네 책방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라며 “이곳에 오면 서점 주인이 ‘도메니코, 네가 좋아할 만한 책이 여기 있어’라며 서가에서 책 한 권을 뽑아 주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볼로냐·트렌토 | 남지원 기자 somnia@kyunghyang.com>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