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이상호,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서 한국 첫 설상 메달

지난 24일 평창 휘닉스 스노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을 딴 이상호가 시상대에서 메달리스트에게 주는 수호랑 인형과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평창 | 연합뉴스

지난 24일 평창 휘닉스 스노경기장에서 열린 남자 스노보드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을 딴 이상호가 시상대에서 메달리스트에게 주는 수호랑 인형과 엄지손가락을 들어보이고 있다. 평창 | 연합뉴스


눈썰매장으로 바뀐 강원 정선군 사북면 고랭지 배추밭에서 스노보드에 푹 빠진 소년의 동계올림픽 메달 꿈이 배추 대신 자라났다. 열매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맺었다. 그때의 ‘배추보이’ 이상호(23·한국체대)는 24일 평창 휘닉스 스노경기장에서 열린 올림픽 스노보드 남자 평행대회전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자신의 고향에서 새로 쓴 ‘한국 첫 동계올림픽 설상 종목 메달’ 역사는 이상호가 배추밭에서 키워온 스노보드 사랑과 강한 정신력을 빼놓고 말할 수 없다.

‘배추보이’는 이상호가 선수로 성장한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은 별명이다. 정선군 스키협회가 집 근처 배추밭을 개량해 눈썰매장을 만든 게 시작이었다. 이상호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 1학년 때 처음 스노보드를 탔다. 공무원이던 아버지 이차원씨는 코치와 매니저를 자처했다. 어릴 땐 학교에 스노보드팀이 없어 직접 스노보드 대회를 찾아다녔다. 이상호는 국내 최고 선수가 됐다. 2005년부터 국가대표 꿈나무 선수에서 청소년 선수로, 후보 선수로 자랐다. 멈춤 없이 성장해 2017 삿포로 동계아시안게임 2관왕, 2016~2017 국제스키연맹(FIS) 스노보드 월드컵 2위에 올랐다.

고비도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참가한 전국대회에서 결승선 근처에 설치된 에어컴프레셔(공기주입기)에 머리를 부딪쳤다. 반년을 단기 기억상실 상태로 지냈다. 아버지가 선수 생활을 그만두자고 설득한 것도 이때였다. 하지만 이상호는 금방 회복해 다시 중3 때부터 대회를 휩쓸었다.

트라우마보다 스노보드 사랑이 더 컸다. 이상호는 “스노보드만 타면 체력적·정신적인 어려움, 현장의 궂은 날씨,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감마저도 잊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상헌 스노보드 알파인 대표팀 코치는 “이상호는 테크닉과 정신력을 모두 갖춘 선수”라며 “특유의 높은 자존감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이 사랑하던 운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형성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상호는 올림픽 전 두 달간의 FIS 월드컵 대회 성적이 부진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낼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이상호 특유의 자신감이 빛을 발한 게 잔 코시르(34·슬로베니아)와의 4강전. 상대보다 예선 순위가 낮아 유리한 레드 코스 대신 블루 코스를 탔다. 이상헌 코치는 경기 전 “오늘 탔던 대로만 타면 아무도 널 못 이긴다”고 했다. 그 말대로였다. 상대보다 0.01초 앞서 들어와 꿈 같은 결승 꿈을 이뤄냈다.

이상호는 “성격상 좋아하지 않는 것, 즐길 수 없는 것들은 금방 포기하곤 했다”며 “하지만 배추밭에서 탄 스노보드는 내게 가장 설레고 재밌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촌스러워도 별명 ‘배추보이’가 좋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