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우리 씨앗’ 살려라… 민간·소규모 공기관들의 분투기

지난 17일 오전 경기 화성시 장안면의 한 비닐하우스. 면적이 132㎡(40평) 정도인 내부는 일반 농가들의 비닐하우스 모습과 달랐다. 배추·파를 비롯한 40여종의 농작물들이 한 공간에 사이좋게 섞여 있었고 잎 사이로 꽃줄기가 솟아오른 배추들과 노랗게 시든 채 바닥에 널린 배추 잎이 눈에 띄었다.

“팔기 위한 것들이 아닙니다. 채종(종자 채집)하기 위한 것들이죠.”

토종종자모임 씨드림의 대표인 안완식 박사(74)의 설명을 듣고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비닐하우스에서 판매용 채소들을 재배하고 운반하는 모습은 봤지만 씨앗을 얻을 때까지 채소를 키우는 장면은 처음이었다. 씨드림은 토종 종자를 심어 농산물을 키우고, 이 농산물로부터 다시 종자를 얻어내는 작업을 7년째 해오고 있다. 그렇게 씨드림이 확보한 토종 종자는 3900여종에 이른다.

‘종자 전쟁’ 시대다. 종자 개발자에게 지적재산권을 부여하도록 한 국제식물신품종보호협약(UPOV)이 1991년 최종 개정된 후 ‘종자는 곧 재산’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각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들은 종자와 소유권·판권 등을 놓고 대립하고 있다. ‘식량 안보’의 중요성까지 더해져 종자 전쟁은 앞으로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도 정부와 거대 기업들이 종자 전쟁 전면에 나서고 있다. 해외 기업에 팔린 종자 소유권·판권을 확보하고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는 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토종 종자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데 열정을 쏟는 곳은 대개 민간 단체들과 중·소규모 공공기관뿐인 현실이다.

“3900점 모았어요” ‘토종 종자 지킴이’ 안완식 박사가 지난 17일 경기 화성시 장안면 ‘씨드림 종자은행’에서 지난 7년간 모아온 토종 종자 3900점 중 일부를 공개했다. 안 박사는 수집한 종자들을 기증자와 기증 시기, 품종명을 적은 종이봉투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한다. 약봉지처럼 생긴 종자봉투에 일련번호가 쓰여 있다. 지역 농가를 돌며 종자를 수집해왔다는 안 박사는 “주민들로부터 약장수라는 오해를 받은 적도 있다”고 했다.


■ 우수한 토종 종자의 외부 유출

한국이 토종 종자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토종 종자의 우수성은 역설적으로 한국을 떠난 뒤 증명되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앉은뱅이 밀’이다. 토종 앉은뱅이 밀 종자는 20세기 초 일본으로 건너가 ‘농림 10호’로 육종됐다. 1952년 미국 농학자 노먼 볼로그는 농림 10호의 우수성을 바탕으로 연구를 시작해 ‘소노라 64호’를 비롯한 수확량이 높은 품종을 개발했다. 볼로그가 개발한 품종은 멕시코와 인도, 동남아시아 등 인구 급증으로 식량 문제에 직면하던 나라들에 보급돼 생산량 증대의 ‘녹색 혁명’을 일으키며 기아 문제를 해결했다. 볼로그는 1970년 세계 기아 문제를 해결했다는 공로로 농학자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우수한 토종 종자가 해외로 빠져나간 사례는 또 있다. 국내에서 개발한 청양고추의 소유권도 글로벌 기업 몬산토에 넘어갔다. 국내에서 자라던 구상나무는 미국으로 건너가 전 세계의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트리로 개발됐는데, 모든 로열티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한 미국의 몫이었다. 파프리카와 토마토 종자는 1g당 약 15만원에 수입한다. 20일 현재 금 시세가 1g당 약 4만2200원임을 감안하면 적지 않은 가격이다. 해당 작물 종자를 보유한 해외 기업들이 로열티를 요구하며 가격이 크게 오른 것이다.

토종 종자가 중요한 것은 우수한 품종 개발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토종 종자에서 얻은 유전 정보로 다양한 연구가 가능해진다. 안완식 박사는 “기후변화가 더욱 빨라지기 때문에 토종 종자 보존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토종 종자는 변화하는 기후·환경에 적응하며 자라고, 그 과정에서 우수한 유전 형질을 획득한다. 전남도 산하 전남농업기술원은 수집된 토종 종자 정보를 바탕으로 기능성 갓과 상추의 품종을 개발하고 있다.

안완식 박사가 유리병에 보관하고 있는 씨앗들.


■ ‘맛의 방주’ 속에 들어간 토종 종자

토종 종자 수집은 생물 다양성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토종 종자가 사라진다는 것은 곧 지구상의 생물종 하나가 멸종하는 일이다. 토종 종자를 모으는 과정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품종을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안 박사는 지난해 강원 정선군에서 토종 종자를 수집하다가 ‘왜무꾸’ 종자를 찾았다. 토종 왜무꾸는 1960년대 이후 국내에서 자취를 감춘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왜무꾸는 순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무와 비슷한 맛이 나면서도 무에서 나는 특유의 매운 기운이 없었다. 안 박사는 이탈리아 ‘다양성을 위한 슬로푸드 재단’이 운영하는 토종 농식품 목록인 ‘맛의 방주(Ark of Taste)’에 왜무꾸를 등재시킬 예정이다. ‘맛의 방주’에는 현재 사라질 위기에 놓인 전 세계 토종 농식품 2401개가 등재돼 있으며, 앉은뱅이 밀, 어간장 등 한국 농식품 32개도 올라 있다.

또 토종 종자를 지키는 일은 농민들이 종자 전쟁의 키를 쥐고 있는 기업들에 종속되지 않는 길이기도 하다. 기업이 개발한 종자는 키운 뒤 다시 받아서 쓸 수가 없다. 농민들이 종자를 받아 농사를 짓거나 되팔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자칫 기업이 요구하는 대로 종자 값을 줘야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인도에서 그 같은 폐해가 나타났다. 1990년대 인도에서는 생산성이 뛰어나다는 몬산토의 Bt 면화 재배 바람이 불었다. 생산성은 기대에 못 미쳤는데, 면화 종자 가격은 10여년 만에 2000배 이상 뛰었다. 부채를 못 이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면화 재배 농민 수가 1990년대부터 2008년까지 20만명이었다.

기업들이 생산하는 종자는 비료와 제초제를 함께 사용해야 잘 자란다. 이 때문에 수입 종자를 쓰면 수입 농약·비료도 구매하게 된다. 반면 토종 종자는 기업이 만든 종자에 비해 토지, 기후 환경에 잘 적응돼 있다. 비료나 제초제에 대한 의존도도 낮다. 친환경 유기농산물 민간인증기관 흙살림의 이태근 회장은 “토종 종자를 지키는 것은 곧 우리 농업 전체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했다.

■ ‘종자 지키기’의 어려움

‘종자 전쟁’의 키는 정부와 기업이 쥐고 있다. 정부는 2012년부터 10년간 예산 4911억원을 들여 ‘골든 시드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파프리카·토마토 등 식물뿐 아니라 수산·가축 종자를 개발하고 종자 자급률을 높여 종자 강국에 도약하는 것이 목표다. 기업들도 인수·합병(M&A)을 통해 종자 시장에서 세력을 다투고 있다. 몬산토, 듀폰, 신젠타 등 10대 글로벌 기업이 세계 종자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1990년대 외환위기 여파로 흥농종묘, 중앙종묘 등 주요 종자업체들이 글로벌 기업에 인수되고 2012년엔 동부팜한농이 몬산토코리아의 종자사업을 인수하는 등 업계의 부침도 심하다.

반면 토종 종자 보존·연구는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뒷전으로 밀려 있다. 토종 종자로 키운 농작물에 대한 수요가 많지 않은 데다, 정부와 기업 모두 당장 돈이 될 만한 종자를 새로 개발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전남농업기술원의 장미향 연구사는 “토종 종자 작물에 대한 수요가 적다보니 관련 예산도 비교적 적게 편성된다”며 “기업들은 민간·공공기관보다 더 많은 토종 종자를 보유하고 있지만 돈이 되는 사업에만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 토종 종자에 대한 관심은 늘고 있다. 2008년 10명이 세운 씨드림은 현재 회원이 9200명까지 늘었다. 도시·근교농업 인구, 귀농 인구들이 친환경 유기농업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토종 종자에 대한 관심도 커진 것이다. 그러나 토종 작물을 찾는 소비자는 그만큼 늘어나지 않았다. 기업에서 개발한 농작물들에 소비자들의 입맛이 길들어 있기 때문이다. 흙살림은 소비자들이 토종 농산물 본연의 맛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한 달에 5만~10만원을 내면 친환경 토종 농산물을 꾸러미로 가정에 배달하는 서비스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태근 회장은 “아직 농촌 문제에 관심 있는 분들만 이용하는 것 같아 아쉽다”며 “많은 소비자들이 토종 농산물을 구매해야만 토종 종자가 농가에 더 보급될 수 있다”고 말했다.

<글 윤승민·사진 김영민 기자 mean@kyunghyang.com>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