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딸 잃은 조밀라의 눈물

지난 19일 사바르의 다섯 평 남짓한 집에서 조밀라(56)를 만났다. 그는 지난해 4월24일 스무 살이던 딸 샬라가 출근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공장 일은 내가 더 잘 알아. (상황이) 이상하면 일 시키지 않겠지. 가서 일 할게요.” 이 말을 남기고 샬라는 도보 20분 거리의 라나플라자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많은 의류공장 노동자들처럼 샬라 역시 가족들을 부양하려 공장 생활을 시작했다. 8세 때 아버지를 여읜 샬라는 15세 때부터 의류공장에서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조밀라는 “샬라가 ‘돈 벌어서 집도 만들고, 어머니에게 바다도 구경시켜드리겠다’고 말하곤 했다”며 흐느꼈다. 언니 에쉬미(25)는 “밤 10시 늦은 시간에 퇴근하고서도 청소와 요리를 잊지 않았다”며 “꿈이 많은 아이였다”고 떠올렸다.

1년이 지났지만… 끝나지 않은 비극 라나플라자 참사 사망자 유족 조밀라가 지난 19일 사바르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딸 샬라의 사진을 보며 울고 있다. 사바르 | 윤승민 기자 mean@kyunghyang.com


참사 전날, 샬라를 비롯한 라나플라자 의류공장 노동자들은 낮 12시 전에 퇴근했다. 건물 외벽에 큰 균열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다음날 다시 공장을 찾았다. “곧 문제가 해결될 테니 안심하고 일하라”던 관리자들의 말을 믿어서가 아니었다. 18세 딸 루비나를 잃은 아르지나(45)는 “루비나가 전날 일하지 않으면 월급을 주지 않는다고 말했다”며 “ ‘인샬라(신의 뜻대로)’라던 전화통화가 딸과의 마지막 대화였다”고 말했다. 일하지 못한 만큼 벌지 못할 돈, 작업 수량을 채우라는 공장 관리자들의 주문, 폭행 압력이 있었다고 참사 생존자들은 입을 모았다. 생존자들의 삶은 쉽지 않았다. 참사 당시 8층에서 일하다 구조된 야스민 악딸(29)은 비정부기구(NGO) 등에서 받은 후원금 4만5000타카(약 60만원)로 ‘오토릭샤(삼륜 오토바이)’를 샀다. 여덟 살 난 아이와 함께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오토릭샤 임대업에 나섰다. 그러나 하나뿐인 오토릭샤는 사고로 망가져 2만타카에 팔렸다. 

할 줄 아는 다른 일이 없어 다시 봉제공장으로 돌아가는 이들도 있었다. 4층에서 일하다 살아난 잘릴(25)은 “의류와 관련없는 사업을 하고 싶지만, 당장 돈을 벌어야 해서 다른 봉제공장에 취직했다”고 말했다. 소규모 봉제공장에서 재봉사로 일하는 쇼리파(20)도 “집에서 재봉틀로 옷을 만들어 팔아 돈을 벌고 싶지만 그러기엔 당장 돈이 급하다”고 말했다.

깊은 상흔에 일손을 잡지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7층에서 일했다는 빠룰 악딸(25)은 자신이 일하던 회사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함께 참사 현장을 찾은 어머니는 “악딸이 사고 이후 정신건강이 많이 악화됐다. 상황도 사람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니누라(29)도 “밤만 되면 천장이 무너지는 악몽을 꾸고 있다”며 “남편이 아파서 일을 해야 하지만 시작하기가 무섭다”고 말했다.

참사 직후 현장에는 가족을 찾기 위해 1만명 가까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아르지나처럼 현장에서 딸의 시신을 발견한 이들도 있었지만 조밀라처럼 아직까지 가족의 행방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사고 희생자 유전자 감식이 시작돼 추가 신원 파악이 이뤄지고 있지만, 300여명은 실종 상태다.

조밀라는 참사 이후 딸의 흔적이라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을 안고 매일 사고 현장을 찾았으나 성과가 없었다. 급기야 조밀라를 돌보기 위해 언니 에쉬미마저 봉제공장 일을 그만뒀다. 에쉬미는 “멀리 서부 라샤이주에서 남편이 시부모를 부양하고 있는데, 나와 아들, 어머니의 생계까지 책임지게 돼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고 말했다. 조밀라는 사진첩을 뒤적이며 샬라의 사진을 찾았다. 조밀라는 “보상금도 필요 없고, 딸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했으면 좋겠다”며 옷자락으로 눈물을 훔쳤다.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