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블로그에는 그간 제가 작성한 글과 기사만 포스팅을 했는데요. 특별히 '도전하는 도시' 시리즈는 전편을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기사 작성자는 맨 아래 '바이라인'을 보시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ㆍ(2)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리, 주민참여예산제의 힘

▲ 주민 10명당 1명 대의원 17개 지구로 나눠 주민총회
저소득층 절반 이상 참여
청소부·장애인 등 약자들도 목소리 내면서 삶도 변화


‘누구도 소외받지 않는 도시’는 세계의 모든 도시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우는 목표 중 하나다. 그러나 예산이 뒷받침되지 않은 목표는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경기가 나빠지면 빈민과 장애인, 노숙인을 위한 정책 관련 예산이 가장 먼저 삭감된다. 목소리를 낼 힘도, 전달할 통로도 없는 이들은 손쉬운 희생양이 된다. 브라질의 지방도시 포르투알레그리를 ‘세계 진보의 수도’로 만든 것은 바로 이 예산 권력을 분산시킨 주민참여예산제의 힘이었다. 공무원들이 짜던 지방정부 예산안을 빈부와 학력 고하를 막론한 모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해 결정할 수 있도록 한 포르투알레그리의 실험은 전 세계에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주민참여예산제가 포르투알레그리에 도입된 것은 1989년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지도 벌써 25년이 넘었다. 세계 경제가 다시 위기에 몰린 지금도 이 제도는 잘 작동하고 있을까, 시 정권이 바뀐 후 들러리 정책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까. 포르투알레그리가 세계에 던져준 희망이 여전히 유효한지 확인하기 위해 그곳을 찾아가봤다.

브라질 남부 도시 포르투알레그리의 시청 대강당에서 지난 5일 하루 일과를 마친 주민 대의원들이 주민참여예산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 정유진 기자


■ “나는 세계 최초 노숙인 대의원”

“버스요금 인상 반대” “지우마(브라질 대통령)의 조세 정책에 맞서 거리를 점령하라”. 지난 5일 포르투알레그리에 발을 딛자마자 마주친 광경은 시청 앞 광장에서 벌어진 대규모 시위였다. 경제위기의 그늘은 지구 반 바퀴 떨어진 브라질에도 어김없이 드리워져 있었다. 지난해 월드컵 경기에 쓴 엄청난 예산의 후폭풍이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것 같았다.

예산 고민은 시청 안 대강당에서 열리고 있던 주민참여예산제 대표자 회의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포르투알레그리 시민소통국의 카를로스 데 소자 부국장은 10여명의 델레가도(delegado·대의원) 앞에서 “주민참여제안으로 올라온 사업의 3분의 1이 정체되고 있다”면서 “이 때문에 시 빚이 늘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의 말을 꼼꼼히 공책에 받아 적고 있던 한 대의원이 눈에 띄었다. 포르투알레그리는 주민총회를 통해 주민 10명당 1명의 대의원을 뽑고, 이 대의원들은 이웃의 의견을 수렴해 시에 전달한다. 시 공무원의 설명을 누구보다 진지하게 듣고 있던 그는 자유발언 시간이 되자 가장 먼저 손을 들고 일어났다. 그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세금은 취약한 사람들을 위한 소득 재분배에 쓰여야 한다”면서 “빈곤층 무료급식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의 이름은 헤이나우두 산토스(48). 그는 기자에게 자신을 “나는 브라질 최초, 아니 세계 최초의 노숙인 대의원”이라고 소개했다. 가난과 폭력 때문에 집을 나온 헤이나우두는 1996년부터 노숙을 시작했다. 여러 도시를 전전하며 거리를 떠돌던 그는 1998년 포르투알레그리에 왔다. 그는 “이곳은 내가 가본 모든 도시들 중에서 그나마 노숙인에게 가장 우호적인 곳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마약에 중독되는 노숙인 수는 나날이 늘었고, 재활의 길을 찾지 못한 노숙인들의 비참한 처지는 계속 나빠지기만 했다. 2005년 시가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에 머물던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도 대의원을 정해 환경개선 예산을 요구하자”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쉽지 않은 도전이었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시 전체를 17개 지구로 세분화해 지구별로 4~5월에 주민총회를 연다. 지구총회 참여자 수에 따라 대의원 수가 결정되기 때문에 노숙인 대의원을 선출하려면 최대한 많은 이들이 총회에 참석해야 했다. 지구총회는 보통 하루 일과가 끝난 저녁에 열린다. 문제는 정부가 운영하는 노숙인 쉼터들 대부분이 저녁이면 출입이 제한된다는 점이었다. 헤이나우두는 “지구총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밤에도 쉼터 문을 열어달라고 모두 함께 ‘투쟁’을 했다”면서 “시민단체의 도움으로 버스를 빌려 30여명의 노숙인들이 총회에 나와 3명의 대의원을 뽑을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 참여예산이 이뤄낸 작은 기적

그때 선출된 대의원이 헤이나우두와 세우소(43),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 브라질까지 왔다가 노숙인으로 전락한 우루과이 출신의 알렉산드리아(40)였다. 이들은 대의원이 된 뒤 거리를 샅샅이 뒤져 시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노숙인들을 찾아내 보건소와 연결시켰다. 그리고 주민참여예산 회의에 한번도 빠짐없이 참석해 노숙인 주거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예산을 달라고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07년, 16번째 대의원 회의에서 드디어 노력이 결실을 맺었다. 시 정부가 새로 짓는 임대아파트 입주권의 3%를 노숙인들에게 주기로 약속한 것이다. 시 외곽의 헤스팅가 마을에 임대아파트가 완공된 후 2012년부터 50여명의 노숙인이 첫 입주를 시작했다. 시 정부는 노숙인들에게 입주 비용과 공과금을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받기로 했다.

지난 6일 헤이나우두와 세우소,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임대아파트에 입주한 한 노숙인 가정을 찾았다. 16살 때부터 집을 나와 마약을 하고 몸을 팔면서 거리를 전전했다는 여성 알리니(32)의 집이었다. 그는 네 아이를 낳았지만 세 아이는 부모에게 맡겨두고 헤어져 살았다. 막내는 길에서 엄마와 노숙하다가 세균에 감염됐고, 후유증으로 지금도 한쪽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헤이나우두와 세우소는 알리니가 임대아파트 입주에 응모할 수 있도록 도왔다. 알리니는 “입주하던 날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면서 “내 집을 가진 뒤 마약을 끊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조만간 또 다른 임대아파트가 완공되면 새로운 노숙인들이 들어갈 예정이다.

주민참여예산제를 통해 변한 것은 알리니의 삶뿐이 아니다. 공무원들과 대등하게 토론하고 예산 과정에 참여해 본 경험은 헤이나우두와 세우소, 알렉산드리아의 삶도 바꿨다. 헤이나우두는 노숙인 생활을 청산하고 경비로 일하고 있으나 여전히 노숙인들을 위한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도 청소부로 일하면서 새 가정을 꾸렸다. 오랫동안 거리 생활을 해왔던 세우소는 “이제 나에게는 수많은 동지들이 생겼다”고 말했다.


포르투알레그리의 노숙인 대의원인 헤이나우두(왼쪽 앞에서 두번째)와 세우소(가운데)가 주민참여예산제 덕에 입주한 알리니의 임대아파트에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다.


■ 약자들에게 설 자리를 준 25년

주민참여예산제를 탄생시킨 것은 어느 특출한 시장의 리더십이 아니었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시민들 스스로의 힘이었다. 포르투알레그리는 1980년대 초부터 외지에서 빈민들이 이주해 와 무허가 주거지를 형성하며 인구가 빠르게 늘기 시작했다. 빈부격차와 불평등은 갈수록 커졌다. 시민 3분의 1은 상·하수도와 포장도로가 없는 슬럼에 방치돼 있었다. 당시 브라질 독재정권의 고질적인 부패 속에서 어떤 공무원도 이들을 신경쓰지 않았다.

독재정권이 무너진 후 1988년 진보정당인 노동자당(PT)이 시 정부를 맡았다. 인권, 주거, 복지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폭발하기 시작했지만 예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전임 시장이 공무원 월급을 멋대로 올려준 탓에 인건비가 시 예산의 98%를 차지했다. 노동자당의 새 시장 올리비우 두트라가 쓸 수 있는 예산은 그 나머지 2%뿐이었다.

훗날 리우그란지두술 주지사까지 지낸 두트라 시장은 주민들과 만나 어려움을 납득시키고자 했다. 이때 주민들과 토론하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가 주민참여예산제였다. 예산의 주체가 된 주민들은 ‘대안없는 요구’에서 벗어나 머리를 맞댔고, 예산권의 일부를 넘겨준 시는 주민들을 시혜의 대상이 아닌 대등한 파트너로 인식했다. 시민들은 매년 두 번 열리는 지구총회에서 대의원을 뽑고, 지역 현안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투표를 한다. 그 투표 결과를 놓고 시 정부와 대의원들이 세부 사항을 논의한다.

주민참여예산제의 가장 큰 성과는 헤이나우두처럼 사회의 가장자리로 떼밀린 이들에게까지 권한을 분산시켰다는 점이다. 시 자료를 보면 지구총회에서 표를 행사한 주민들의 가구 소득은 최저 임금의 두배 수준에 불과한 저소득층이 절반 이상이며, 고등교육을 받지 못한 저학력층도 80%에 이른다. 주민참여예산제가 25년간 이뤄낸 성과는 눈부시다. 이제까지 6300여건의 사업이 주민들이 짠 예산으로 집행됐다. 이 제도가 도입된 후 10년 만에 식수 보급률은 80%에서 98%로 증가했다. 하수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 비율은 46%에서 85%로 수직 상승했다. 저소득층 지역에 학교가 늘어나면서 공립학교 재학생 수는 두배로 늘었다. 주민참여예산제는 아메리카·유럽·아시아·아프리카 등 세계 1500개 이상의 도시로 퍼져나갔다.

<포르투알레그리 | 글·사진 정유진 기자 sogun77@kyunghyang.com>



Posted by 윤승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