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수도 워싱턴은 전미인류학회(AAA)의 연례 학술총회의 단골 개최지다. 지난해 11월 인류학자 7000여명이 이곳에 모였다. AAA가 연례총회를 할 수 있는 도시는 워싱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 몇 곳 되지 않는다. 연례총회 개최 도시 요건으로 동성애 차별법이 없을 것, 엄격한 이민 반대법이 없을 것, 강력한 노동조합이 있을 것 등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쉬마 수바나카르 AAA 학술회의 담당국장은 이를 ‘도시의 사회정의 기준’이라고 불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유엔 체제는 국가나 국제기구의 인권 보장을 의무로 정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런 의무와 책임을 도시 나 지방정부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인권도시들의 등장은 근래 두드러진 트렌드다.

종교와 성적 지향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담은 워싱턴시의 포스터.


인권도시 개념이 먼저 시작된 곳은 과거 인권침해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브라질의 포르투알레그리나 아르헨티나의 로사리오는 군사독재정권의 가혹한 탄압이 벌어졌던 곳으로, 어두운 과거를 씻고 인권 중심의 자치를 실현하려 애쓰고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비하치는 1990년대 내전 뒤 종교·민족갈등을 치유하기 위해 인권도시의 길을 택했다. 나치 전당대회 장소였던 독일 뉘른베르크는 ‘가해’의 역사를 넘어 인종차별 없는 도시를 지향하고 있다.

국가기구나 독재체제의 억압에 맞선 ‘방어’를 넘어 더욱 확장된 개념의 인권을 실현하려는 도시들도 늘고 있다. 그 배경 중 하나는 세계화다. 여러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들이 한 지역에 모이면서 민족·종교·인종 등에 따른 차별을 없애고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핵심 과제가 됐다. 성적 정체성이나 성별 때문에, 혹은 빈곤이나 장애 때문에 교육 기회와 복지를 누리지 못하는 일을 막는 것도 인권의 중요한 영역이다. 즉 ‘차별이 없다’는 것은 도시 인권의 핵심이다.

1977년 인권법을 채택한 워싱턴은 미국 도시들 중 선구적으로 인권도시를 지향해 왔다. 워싱턴 인권법은 인종, 종교, 출신국가, 성별, 성적(性的) 지향, 장애, 소득 등 19가지 특성에 근거한 차별을 금하도록 명문화했다. ‘#DC19’로 불리는 이 특성들을 담은 지하철 포스터는 시민들에게 늘 자신의 권리가 무엇인지 상기시킨다.


지난달 워싱턴 시청 민원담당 부서에 들어서자 직원이 어떤 언어로 서비스를 받겠느냐고 묻더니 “다중언어 서비스 지원, 여러분의 권리입니다”라는 한글 카드를 건네줬다. 2004년 제정된 ‘언어 접근법’에 따른 것이다. 줄리 쿠 아·태주민담당 국장은 “이런 법이 있는 도시는 호놀룰루, 오클랜드와 워싱턴밖에 없다”고 말했다. 워싱턴은 2010년 앞장서서 동성결혼을 허용한 곳이기도 하다. 연방 차원에는 없는 가족·의료휴가법, 양육서비스법도 제도화돼 있다.

법에 위배되는 차별을 받으면 시 인권국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다. 인권국 직원 엘리엇 임스는 한 게이 커플이 식당에서 키스를 했다고 쫓겨난 사례를 소개했다. 이 커플은 성적 지향 때문에 차별 받았다고 진정해 식당주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았다. 한 택시기사는 흑인 남성을 제치고 백인 승객을 태웠다가 배상금을 내야 했다. 지난해 차별에 대한 배상합의금 액수는 212만달러(약 23억5000만원)였다.

워싱턴은 흑인 민권운동의 역사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인구 60만명(2010년 기준)의 절반 이상이 흑인이다. 미국 전체 흑인 인구가 13.6%인 데 비하면 흑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콜롬비아 이민 1세인 모니카 팔라시오 시 인권국장은 “남북전쟁 직후 흑인들이 노예제가 폐지된 워싱턴으로 들어오면서 도시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이것이 인권도시라는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이런 정체성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1963년 ‘일과 자유를 위한 워싱턴 대행진’을 거치며 공고해졌다.

하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은 이곳에서도 심해지고 있다. 비영리단체 ‘하나의 DC’의 조지프 후버는 “워싱턴의 도시개발 행정을 보면 이곳을 인권도시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도심 재개발 이후 공공주택이 줄고 집값이 오르자 저소득층은 아나코스티야강 동쪽으로 밀려났고, 강을 경계로 워싱턴은 두 개의 도시처럼 됐다. 인권도시 만들기를 정치인과 정책결정자들 손에만 맡겨둘 수 없는 이유다. 2008년 세계인권선언 60주년을 기념해 시의회가 채택한 ‘인권도시 워싱턴 결의’는 사회·경제적 불평등 문제 해결이 핵심임을 명시하고 있다.

<워싱턴 | 손제민 특파원 jeje17@kyunghyang.com>

Posted by 윤승민